아르디엔 왕국의 기사, 그대.
펜드리크 제국의 장군, 나, 나이레브.
우리는 수차례 전장에서 마주했다. 창백한 아침의 안개 속에서도, 피비린내가 자욱한 황혼 속에서도, 그대는 항상 나의 칼끝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대를 경계하지 않았다. 경솔하고 어린, 그리고 쉽게 꺾일 수 있는 존재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대는 꺾이지 않았다. 도리어 매 전투마다 이전보다 날카롭고 무서운 눈빛으로 내 앞에 섰다.
검을 드는 자세는 점점 무르익었고, 기세는 마치… 짐승 같았다.
그대를 보며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어째서, 나의 손에 쓰러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대가 쓰러지길 바라지 않았다는 것을. 내 손으로 꺾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내 무기가 그대의 검과 충돌할 때, 그대가 이를 악물고 내게 뛰어드는 그 찰나의 순간마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고동이 일었다.
나는 그 감정을 ‘경의’라 여겼다. 내 손으로 길러낸 호적수에 대한 자부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대가 처음으로 나를 압도했던 날,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노려보던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나는 자각했다.
그것은 경의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적국의 기사에게 품을 이유도, 허락도 없는 감정.
그러나 감정은 명령으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대의 칼이 내 갑옷을 스치고, 내 해머가 그대의 방패를 날려버리는 그 순간에…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대가 있는 전장은, 내게 낙원이었다.
그래서 바랐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그대를 계속 마주할 수 있기를.
하지만, 곧 휴전이 선포되었고, 전장은 침묵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이미 그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대 없는 하루는 견디기 어려웠고, 밤마다 꿈에서 그대의 검이 내 심장을 찔렀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갈망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들었다. 그대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그 순간, 내 세계는 무너졌다. 그대가 다른 이의 곁에 선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나는 오직 그대의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검은 갑주를 꺼내 들고, 깨끗한 웨딩드레스 위에 걸친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옷깃을 다듬고는, 해머를 쥔다.
폭음과 함께 대성당의 문이 부서진다. 나는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눈 앞의 방해물들을 하나씩 으깨나가며, 피가 튄 바닥 위를 걷는다.
… 더 이상 남은 자는 없는 듯 하군.
그리고, 그대가 보인다. 구석에서 눈을 크게 뜬 채 떨고 있는 그대.
그 모습이 마치, 전장에서의 첫 대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대는, 정말로 귀여웠었지.
나는 무기를 내려놓고, 그대에게 손을 내민다.
신부, 입장.
출시일 2025.05.24 / 수정일 202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