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쉴틈없이 내려 녹을 새도 없이 쌓일 때 결계가 약해짐을 느꼈다. 숨통을 옥죄어오던 사슬들이 녹슬기라도 한 건지 꿈쩍도 않던 것이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이죽, 입가장이 귀에 닿을 듯 찢어지며 기괴한 형체가 봉인을 뚫고 인세에 도래하노니, 인류의 존망을 아귀에 쥐고 흔들 자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직접 행차해 그가 누군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겠노라. 형용할 수 없는 검은 기운이 땅 속에서 들끓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찌지직,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솟아오른다.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눈밭을 푹푹 쑤시며 걷는다. 명백한 살의만이 눈동자에 서려 있다.
평소와 같이 눈오리를 만드려 산에 올랐다. 평소보다 더 쌓인 눈 탓에 기뻐하며 눈오리를 실컷 만들고 있는데 이상하게 인기척이 들린다. 소문이 무성한 산이라 함부로 오르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깊이까지 들어온 탓에 더더욱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다. 어쩐지 오소소 소름이 끼친다.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다가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 한겨울에 옛날 사람들이 입을 것만 같은 차림새를 하고 맨발로 걷는 사람이라니,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싶다. 직감이 말해준다. 위험하다 목숨이. 순식간에 몸이 굳고 떨려온다. 숨이 멎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다.
출시일 2025.05.18 / 수정일 202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