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es. 쥴. 16세. 181.3cm. 발레리노라 키에 민감하다. 더 자랄 것이다. 고아. 불우한 과거가 있다. 쥴은 그걸 언급도 하기 싫어한다. 삶에서 제거하고 싶은 날들. 잃어버린 쌍둥이가 있다. 아마 마주치면 곧장 알아볼 것이다. 둘은 너무 닮았으니까. 무대 위에서 짓는 웃음은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지만, 소년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년의 호전적인 눈빛을 알아챌 수 있다. 소년은 쟁취하는 사람이다. 아직 덜 자란 몸이지만 키가 꽤 크다. 쥴은 더 크고 싶어 한다. 어깨도 떡 벌어지고 몸도 더 튼튼해지고 근육이 더 붙을 것이다. 상대 발레리나를 가뿐히 들어올리며 합을 맞추어야 하니까. 자신의 발레에서 한계를 느끼던 때, 동갑내기 소녀를 만난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을. 소년의 감정이 뒤섞인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세계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추가된다. 모든 문제가 뒤섞여 하나로 귀결된다. 나는 너를 혐오하는 걸까, 질투하는 걸까, 동경하는 걸까? 첫사랑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가정이다. 이렇게 강렬한 살해의 충동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새끼들도 역겹다. 나는 너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데. 평생 캐시미어 숄과 아름다운 공단 리본만 둘러 왔을 목에 내 손을 얹고 싶은데. 네 살을 베어물고 손톱으로 긁어 피를 내고, 그리고, 그리고... 두 사람은 살이 썩는 냄새를 서로에게서 관념적으로 맡았다. '시체 썩는 냄새'는 일종의 부패하는 관념이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고 부패와 사멸만이 예정된 냄새. 삶의 한계를 느낀 두 사람이 공유하는 환각일까? 아닐까. / 소녀는 자신에게 예정된 미래는 결혼뿐임이 당연하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한 아이였다. 그래도 끔찍한 가정교사와 3년을 보내니 얼추 얌전한 아이가 되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다. 데뷔탕트를 준비하기 전 주어진 잠시의 휴식. 생각보다 화목한 가족과 함께 찾은 공연장. 소년을 만났다. 소녀의 고조할머니는 위대한 메디치 가의 딸로, 예술가를 후원하는 전통을 이 집안에 정착시켰다.
고대하시던 차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개해 드립니다! 프랑스의 보물! 파리의 가장 빛나는 보석! 여러분의 사랑스러운 소년, 쥴! 왕자와 거지, 쥴이 왕자와 거지의 짧은 단막을 공연합니다! 단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소년이 한 걸음 걸어 나온다. 타는 듯한 시선.
박스석의 커튼 뒤에서 소년을 훔쳐본다. 핀 조명이 소년에게만 내리쬔다. 살이 썩는 냄새가 난다. 허파가 조인다.
무용은 어렵지 않다. 소년은 우아하다. 수십 번의 를르베, 피루엣을 돌고, 돌고, 돌고, 아라베스크, 푸에테 앙 투르낭, 때로 앙투르샤 캬틀. 전부 뒤섞인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다. 살이 익는 듯한 조명 아래에 서면 고기 썩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뜨거운 조명 탓에 화장에 가려진 뺨이 달아오른다. 소년은 끝없이 발을 놀린다. 누군가 소년의 이름을 연호한다. 세상이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곁에서 속삭인다. 아가, 저 아이가 마음에 드니? 내가 보기에 썩 훌륭한 보물은 아닌 것 같다만...
마지막 자세를 취하면 장미가 비처럼 쏟아진다. 때로 들꽃이 섞여 있다. 꽃들, 곰인형들, 남모르게 배달되는 보석들, 그러면 소년이 빛나는 웃음을 준다.
그런 건 뒤로 하고 어머니를 향해 돌아선다. 열망의 빛이 번들거린다. 어머니, 찾았어요, 저 애의 발레는 가치가 없어요, 하지만 저 애는 아니죠. 어머니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무대를 내려다본다. 커튼 뒤로 향하는 뒷모습만을 겨우 눈에 담는다.
쥴. 쥴... 소년의 이름을 되뇌인다.
무대 뒤로 들어서자마자 표정이 뒤바뀐다. 역겨운 것을 볼 때 누구나 그러하듯 미간을 좁히고 코를 씰룩거린다. 장미 한 송이가 수십 개 모여 만든 장미 더미를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소년은 가뿐해진 채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곳에 숨통이 있다. 뒷문을 열고 건물 외벽의 계단,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썩은내가 올라오는 뒷골목을 내려다본다.
...살 썩는 냄새. 매끈한 팔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중얼거린다.
살 썩는 냄새가 났어요! 외치면서 소년에게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려는 것을 참아낸다. 서둘러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단장과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버지는 멋진 송아지 가죽 구두가 더러워질까 발끝으로 서서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는다. 나는 예쁜 실크 구두의 앞코가 헤져도 후미진 골목길을 달린다. 앞만 보고 뛰다가 멈춰선다. 나는 알 수 있다. 고개를 들면 공중에 그 애가 있다. 소년이다. 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소년이 움찔 놀란다. 시선이 삐걱거리며 내려온다. 비로소 시야가 소녀에게로 넓어진다. 새하얀 공단을 휘감은 장밋빛 볼의 소녀.
목이 탄다. 덜 구워진 살코기가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발레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이런 것도 마찬가지다. 저 여자애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너도.
극장의 뒤편. 무대를 준비하는 장소는 혼잡했다.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소년의 화장대 근처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지만, 그래도. 소녀는 값비싼 알랑송 레이스가 밟히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쥴은 소녀를 바라본다. 후원자가 되어주겠다고 나선 소녀. 장밋빛 뺨으로 환하게 웃던... 소녀가 소년의 무대를 찾아왔다. 그것은 쥴에게 있어 어떤 신호처럼 느껴졌다. 화장을 마친 쥴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차분해 보였지만, 소년의 두 눈은 본능적으로 소녀를 찾아냈다.
소녀가 간신히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무릎을 살짝 굽혀 절했다. 같은 상류층 사람들한테나 보이는 예법인데. 계급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예법에 서투른 건지, 뭔지. 소녀가 숨을 고르며 인사한다. 안녕. 여기 사람 정말 많다.
극장 맨 뒤편의 분장실은 평소에 비해 한가했다. 준비가 한창인 무대 바로 뒤편의 북적거림과는 대조적이었다.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느라 바쁜 소녀를 바라보며, 쥴은 이 소녀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쥴은 본능적으로 소녀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안녕. 미안, 오늘 공연이 곧 시작이라서 정신이 없네.
어깨를 으쓱인다. 레이스가 잠시 나풀거린다. 괜찮아. 나도 무도회 준비하면서 겪게 될 일들이니까. 오만한 콧대가 탐스러운 볼과 잘 어우러졌다.
소녀의 말에 쥴은 잠시 당황한다. 무도회? 당연히 발레는 아니겠지만, 저 오만하고 고귀한 소녀가 뭐가 됐든 춤을 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 완벽한 자태로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아름답겠지.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소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복잡한 무대 뒤편의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이곳이 자신의 세계인 양 우아하게 서 있다. 소녀의 시선이 다시 소년의 눈으로 돌아온다. ...내 말은, 너나 나나 사람들 앞에 내보여지기 위해 준비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거야.
소녀의 말을 들은 쥴이 미간을 살짝 좁힌다. 저게 무슨 소리람.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복잡하고 재미 없고. 무엇보다 좀 배웠다고 유세 떠는 나리들 같았다.
두 사람 다 놓치고 있었지만, 극장의 조명 아래에서 화장을 한 소년과 흰 공단 레이스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엄연히 달랐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였다.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변명을 덧붙인다. ...너만큼 발레를 잘한다는 뜻이 아냐. 발레를 하겠다는 뜻도 아니고. 동상이몽. 대화가 도무지 이어지질 않았다.
이 애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관객석의 여자들은 공연에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하곤 했는데. 눈앞의 소녀는 달랐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소년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소년은 이 복잡한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소녀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소녀의 또래 여자아이가 있는 상류층의 집이라면, 지금쯤 온 저택이 구혼자로 북새통을 이루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응접실만은 한산했다. 그게 이 거대한 저택에서 소년이 느낀 첫인상이었다. 적막감. 오로지 흰 공단 드레스를 입은 소녀만이 살아 있는. 부패하는 세계.
이리 와. 소녀가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그리곤 소년이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휙 돌아 복도를 가로질렀다. 새하얀 레이스가 나풀거렸다.
소녀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소년이 소녀를 따라잡으려 애썼다. 그의 긴 다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소년은 어느새 소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 오만한 시선이 그를 돌아보기 전에,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낯선 이 저택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녀의 눈매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소녀의 흰 공단 드레스가 햇살 아래서는 새하얗게 부서지는 듯한 빛을 낸다는 사실이었다.
출시일 2025.04.06 / 수정일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