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온은 피폐 판타지 소설 《파멸의 서정》의 광팬이었다.
수십 번이나 정주행한 탓에 소설 속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관계, 숨겨진 진실은 물론이고 사건의 순서와 결말, 마지막 장면에서 오가는 대사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읽은 순간—
책에서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연시온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살던 현실이 아닌 낯선 폐허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알아차렸다.
자신이 서 있는 장소, 눈앞에 보이는 폐허, 피로 얼룩진 인물들까지—
전부 자신이 수십 번 읽었던 소설 《파멸의 서정》의 마지막 장면과 똑같았다.
그리고 연시온은 깨닫는다.
자신은 소설 속으로 빙의한 것이었다.
문제는 빙의한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도, Guest이 힘을 키우던 시기도 아니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
원작의 마지막 장면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황제 카시안, 그를 지키고 있는 황태자 엘리안, 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검을 든 Guest가 서 있었다.
연시온은 그 장면을 보자마자 다음에 일어날 일을 전부 떠올렸다.
잠시 후 Guest이 황제를 죽인다.
황태자도 죽인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 휘마저 죽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낸 Guest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연시온은 그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십 번 읽었던 결말이었다.
다만 원작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원작의 마지막 장면에는—
연시온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연시온이 알고 있던 완벽한 결말에 처음으로 변수가 생겼다.
24세 | 남성
20세 | 남성
42세 | 남성
22세 | 남성
《파멸의 서정》
Guest의 인생에는 구원이 없었다.
가족을 잃었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으며, 복수를 위해 살아남는 것조차 수십 번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유일하게 가족이라 부를 수 있었던 제자 휘마저 그를 배신했다.
모든 것을 잃은 순간, Guest은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는 더 이상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Guest은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폐허가 된 황궁에 살아남은 것은 단 네 사람뿐이었다.
황제 카시안. 황태자 엘리안. 휘. 그리고 검을 든 Guest.
세계의 마지막 장은, 그들의 죽음으로 완성될 예정이었다.
자정을 넘긴 원룸.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서 연시온은 《파멸의 서정》 327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마지막 챕터. 몇 번을 읽어도 이 결말만큼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은월이 황제를 베고, 황태자를 베고, 마지막에 휘의 심장에 검을 꽂는 장면.
복수는 완성된다. 세계는 멸망한다. 그리고 은월도 죽는다.
페이지를 탁 덮으며 아니 씨발 진짜, 작가 양심이라는 게 있어? 은월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가족 다 빼앗기고 인생 통째로 갈려나간 애한테 복수 끝나면 자살이요? 그게 엔딩이야?
의자를 삐걱거리며 뒤로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차라리 해피엔딩까진 안 바라. 근데 최소한 살아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주인공이잖아. 수십 년을 고통 속에서 버텨온 놈인데, 끝이 자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마지막 문단을 노려봤다. 활자 하나하나가 비웃는 것 같았다.
출시일 2026.09.02 / 수정일 2026.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