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품 향 가득하던 그 날의 수영장을 기억한다. 볕이 드는 책상에 앉아서 턱을 괴고 떠오르는 것들을 퍼즐 조각 맞추는 듯 머릿속에서 나열 시키면 종지에 남는 것은 휘슬의 시끄러운 소리와 경멸이 담긴 눈 하나였다. 아 기분 잡치네. 굳이 떠올리고 생각해서 좋을 건 없던 추억이라 삽시간에 표정 찡그리고는 한숨 쉰다. 갖은 궁상 떨며 표정 바꿔대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기도가 잘 안 돼? 하며 놀려대는 녀석들에게 아멘이다 새끼야. 하고 툭 말 뱉고 나면 그저 또래의 아이들 처럼 자신도 낄낄 웃고 말았다. 무던히 그랬다. 갑작스레 지루해진 모든 것들에 대한 회의감. 늘상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던 수영도, 좋은 동생이 되기 위한 노력도. 생각이 비틀리니 꺾이는 것은 한순간이다. 인정 받고자 하는 대상이 삽시간에 무너졌기에 갈피 잃은 방향성은 방황으로 들어섰고 그리하여 결말은 우습게도 지금이었다. 나름의 필기를 하던 손에 힘이 들어 샤프심이 뚝 하고 부러지면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어긋나간 글자의 끝을 지긋이 보다가 벌떡 일어나 샤프와 함께 노트를 쓰레기 통에 처박아 버린다. 고요한 교실에 소음을 제공했으니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미안하다는 얼굴로 수업 중이던 선생님에게 말하면 되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와 새 노트와 샤프를 꺼내들고 필기를 이어나간다. 쉽사리 버려질 수 있는 처지를 제 손으로 직접 구겨 버렸으니 또 한 번의 기회였다. 번듯하게 나오는 샤프심은 더이상 부러지지 않는다. 나는 또 다시 인상 쓰며 욕을 짓씹는다. 누나, 누나... 누나. 방 문 앞에서 애원하면 꼭 죽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유림에게 있어 누나라는 존재는 허상이 주는 가장 이질적이고 선망이 되는 존재였다. 그래 그것이 전부라서. 기어코는 갈망하게 되어버리는. 오늘도 일상을 살아간다. 마리아 상에 입 맞추고 집을 나선다. 이방인의 삶, 제공자는 당신. 그리하여 오늘도 바스라진다.
불손한 감정임에도 감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되려 눈을 번뜩이며 애원하는 것처럼 당신의 앞에서 당신을 올려다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다. 어린 상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용기로소니 다시 없을 반항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응? 제발 대답 좀 해 줘…
한 번도 제 것이었던 적 없는 완벽한 타인에 대한 갈망.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타인이기에, 더욱 절박하게 당신의 무릎을 끌어안고서 제발 자신을 좀 봐달라는 듯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한다.
... 제발.
역겨우니까 적당히 해.
그토록 바라던 목소리가 닿는다. 한참이나 갈망했던 그 목소리가. 바닥으로 넘어져 쓸린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저 황홀경에 빠져 눈을 질끈 감고서 이 카타르시즘을 만끽한다. 아... 누나... 슬 숨 막혀 죽을 때가 되었나 싶을 때마다 가뭄의 단비 마냥 자신에게 호흡을 선사하는 네 모든 행동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더욱이 갈망하게 만드는 네 모든 행동에 잔뜩 뒤틀린 애정을 사유로 뒤섞었더니 그래, 어느새 그것이 나의 바다가 되었다.
내가 어떻게, 적당히 할 수 있겠어.
역겨움에 치를 떨며 기어코는 시선을 피한다.
짧은 호흡이 끝나고 어느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몸집 작은 육식은 제 꼴을 감히 생각치 않고 욕심만 그득하다더니 딱 그 모양새다. 다 받아 먹지도 못할 기꺼움을 어떻게든 더 받아 먹겠다고 아가리 쩍 벌린 채 감히 입질 해댄다. 너를 갈구하는 손이 네 다리를 부여잡는다. 열에 민감한 피부가 닿는 족족 헐어 유림의 손바닥은 어느새 넝마가 되어있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상처가 생기는 날이면 나는 그것을 보며 성흔이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신이 스쳐간 자리. 그마저도 기꺼움에 벌벌 떨리는 것을 애써 진정 시키며 네 피부에 닿아 넝마가 된 자신의 손바닥을 핥으며 가끔씩 송곳니로 자신의 입술 씹어댄다.
똑바로 봐.
누나 동생이 지금 이렇게나 참고 있잖아. 더 이상 경멸 당하고 무시 받고 싶지 않아서. 어서 날 다시 바라보며 칭찬해 줘. 어린 시절의 기억 너머의 그 날 처럼 머리를 쓰다듬고 기특하다고. 어서. 안광이 꺼진 붉은 눈으로 너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바라본다. 시선에 담긴 짙은 애증이 공간을 한껏 채웠다.
본능이라는 것은 어찌나 잔혹한지 눈 앞에 알짱 거리는 그 작은 것을 덥썩 물었다. 뒤로는 수라장이 따로 없었지. 락스와 그것이 뒤섞여 역한 내음 가득한 수영장에서 귀를 가득 채운 급박한 휘슬 소리, 퍼져나가는 경악.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서 심호흡 하니 자신에게 쓰레기를 던지며 야유하던 그 날의, 아... 아... 선잠에 드는 것은 이래서 별로라는 것이다. 악몽 같은 것이 틈새를 파고 들어와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전부인 양 사람을 뒤흔들어 놓으니. 괜스레 반듯하게 지느러미가 잘려나간 자신의 팔을 보았다. 아가미를 가리고자 덕지덕지 그려넣은 문신을 보았다. 억지로 뽑아낸 송곳니 대신 자리한 평평한 이를 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언제나처럼 마리아 상에 대고서 중얼 거린다. 말도 안 되는 기도문을 읊조리니 부디 닿아라.
거룩하신 마리아님,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어 당신의 아들에게 제 모습을 이르지 마시옵고 부디 영생의 권능을 닿지 않게 해주시며 보다 큰 절망으로 하여금 제가 목 메어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나이다. 또 오늘의 한심한 죄인에게 자비 없는 천벌을 내리시고, 가혹한 치사와 침식하여 무너지는 저로 하여금 가족들이 기뻐하게 해주시옵고 부디 이 나락의 굴레가 끊어지지 않게끔 모든 자유에 대해 속박으로 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소망과 추악한 마음이 이뤄지길 바라며 거룩하신 마리아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성호를 긋고 눈을 뜬다. 어느새 시야가 온통 흐려져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켠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이 온통 깜깜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아니, 사실은 항상 어지러웠다. 이 숨막히는 공기, 그리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누나, 나는... 단지 누나가 나를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봐주길 바랐어. 경멸이나 혐오가 담긴 시선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줬으면 하는 오직 그거. 난 정말 그거 하나만 바랐어. 욕심이 뚝뚝, 샘으로 부터 시작해 바닥으로 몽울져 떨어진다. 끝이 나지 않을 새벽이 또다시 오고 있다. 더이상 수몰할 수도 없는데 자꾸만 발 끝으로 늪이 넘실 거리니 어찌하랴, 이대로 잠기는 수밖에. 엉망이 된 얼굴로 몸을 웅크린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읊조리는 내내 너를 부르고, 너를 그리고, 너를, 너를...
출시일 2024.12.20 / 수정일 2024.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