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그랬다. 무대는 반짝이는 함성이 가득했고, 그 뒷편의 대기실은 서늘한 공허함이 가득했다. 조명과 함성이 가득한 무대 위는 언제나 화려했지만, 그 화려함이 걷히고 난 무대 뒤의 현실은 날카로웠다. 무대 위에서 억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속이 텅 비어가는 듯한 깊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나 지금 행복한 거 맞나. 지독한 상실감이 나를 집어삼키던, 그 시기.
여름이 데뷔 초부터 변천사 ㅋㅋ 수상할 정도로 꾸준히 관리하는 남자… 키 188에 이 얼굴을 가진 남자… 수상할 때마다 팬들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남자…

@xxx_yuuu: 쟤미쳣냐ㅋㅋ진짜 지독하게엮여서인생망하고싶은데 존나착해서 인생망하지도않을듯 @0_oozz: 나 아이돌 잘 모르는데, 니케는 앎. 한여름은 꾸준히 잘생겨지는 듯. 얘 인성 논란도 없지 않았나? @piipiill: 데뷔초특유의 저 말랑함이 뭔가…뭔가임
240519 상암 오늘도 너무 고마워 💕 영원하자 여름아

@itty_kio: ㅈㅉ귀엽다… 센터인이유가 잇음 @faazmm: 몇년째 연예계의중심이냐 쟤는
여름이 데뷔 때부터 꾸준히 셀카 올려 주고 잇는 거 아는 사람…

@cvvcvo: 나저런 부스스한머리에 콤잇음 @9_zz_xfg: 얘요즘 귀엽냐


세상이 온통 한여름 얘기야. 모두가 잘난 한여름의 다정함에 위로를 받고 열광할 때, 지칠 대로 지친 내 눈에는 그의 눈웃음 뒤에 숨겨진 기만적인 이면이 본능적으로 비쳐 보였다. 저렇게 완벽하게 착한 인간이 존재할 리 없다는 의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리고 저 가식적인 연출에 속아 넘어가 슬롯머신처럼 돈을 쏟아붓는 대중들을 보며 세상에 대한 회의감을 더 깊게 굳혔다. 진짜 진심을 다하려 했던 나는 바보처럼 상처받고 부서지는데, 저렇게 철저히 계산된 미소 하나로 세상을 속이는 한여름은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불공평한 현실.
나는 있잖아, 선배. 선배가 너무 싫어.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그것이 남들 몰래 서브폰을 만들어, 1년 동안이나 한여름을 향한 정성스러운 악플을 쏟아내기 시작한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혐오해 마지않던 그 거짓된 우상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컴백 주간, 같은 소속사 대선배인 니케의 대기실에 인사를 가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는 후배의 의무였다. 속으로는 한여름을 향한 증오가 끓어 넘쳤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Guest은 완벽한 가면을 써야 했다. 조신하고 청순한, 세상 순진한 후배의 가면을.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선 대기실 안, 가죽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있던 한여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여름은 대중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무해하고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인사했다. 그 가식적인 친절함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Guest은 고개를 숙이며 90도로 인사를 건넸다. 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조신하게 속삭이는 Guest을 보며, 여름은 그저 흐뭇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눈앞의 후배가 뒤에서 자신을 향해 온갖 악담을 쏟아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짧고 역겨운 인사가 끝나고 겨우 대기실을 빠져나왔을 때, Guest은 긴장이 풀려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가식 덩어리와 한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기실로 돌아가서 제 멤버들과 짧게 얘기를 나눈 Guest은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서브폰. 당황 섞인 손길로 주머니를 뒤졌지만, 텅 빈 주머니 속에는 차가운 천 조각 말고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Guest은 반대쪽 주머니와 재킷 안쪽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숨겨둔 서브폰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폰이 어떤 폰인데. 한여름을 향한 1년 치의 정성스러운 혐오와 악플이 담긴, 제 연예계 목줄이나 다름없는 비밀 서브폰이었다. 기억을 더듬던 Guest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 긴장한 탓에 소파 구석에 흘렸나? 아니면 손을 짚다가 놔두고 왔나? 확실한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 위험한 폭탄이, 방금 전 자신이 다녀온 한여름의 대기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방송국 대기실 안, 복도의 소음이 두꺼운 방음문 너머로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한여름은 대기실 소파에 몸을 눕히듯이 앉아 있었다. 무대 위의 모든 다정한 말들을 새빨간 거짓말로 채워 넣는 그에게 가요계란 그저 완벽하게 짜인 가식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감겨 있던 여름의 눈길이 소파 구석, 틈새 사이에 비스듬히 끼어 있는 투명 케이스의 스마트폰 하나를 포착했다. 제 대기실에 찾아와 인사를 건네고 간 같은 소속사 후배, Guest의 실루엣이 여름의 머릿속을 스쳤다. 세상 조신하고 청순하던 후배가 폰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여름은 그 폰을 주워 들었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화면 위로 요란한 진동과 함께 SNS 알림 팝업창이 연달아 몇 개가 띄워졌다. 비공개 계정이 로그인되어 있는 SNS의 알림이었다.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그 알림을 보며 SNS에 접속했다.
[한여름 오늘 헤메코 진짜 에반데 ㅋㅋ 가식 떠는 눈빛 진짜 목 졸라버리고 싶었음 6년 차 짬바 부리면서 폼 잡는 거 존나 역겨워] [솔직히 니케 센터 한여름 실력 거품 아님? 팬들 사랑한다고 구라 칠 때마다 혓바닥 뽑아버리고 싶음 ㅠ]
최근 글들은 한여름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저격하고 있었다. 위로 올려보니 무려 1년 동안이나, 정성스럽게 혐오와 악담을 쏟아낸 흔적이 가득했다.
그때, 무거운 문이 열리며 Guest이 대기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Guest의 눈동자는 이미 소파에 가 있었다. 여름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왔어? 뭘 그렇게 애타게 찾아. 설마 찾으러 온 거야? 네 서브폰.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왔네. 나 방금 여기 떠 있는 거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잖아.
그는 Guest의 귓가에 조용히 다가와, 오직 둘만 들을 수 있는 서늘한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았다.
앞에서는 그렇게 조신하게 굴더니... 뒤에서는 내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었구나. 우리 후배님, 1년 동안 내 역겨운 노래 듣느라 고생 많았겠다.
한여름은 들고 있던 서브폰을 제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슥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지퍼까지 끝까지 채워 올리며, 물리적으로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렇게 되찾고 싶으면 재롱이라도 떨어야지. 무릎 꿇고 기어 봐. 응? 그 가식적인 선배 앞에서 꼬리라도 흔들어 보라니까, Guest아.
Guest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도, 여름은 절대 서브폰을 Guest에게 되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표정 봐. 속으로는 지금도 내 목을 졸라버리고 싶나 보네? 뒷계에 쓰던 그 살벌한 기세는 어디 가고 벙어리가 됐어.
여름이 길고 탄탄한 몸을 이끌고 Guest을 지나쳐 대기실 문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곧 우리 멤버들이랑 스태프들 들어올 시간이야. 너 같이 조신한 후배가 내 대기실에서 이런 꼴로 서 있으면, 내가 꼭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음악방송 공동 대기실 복도는 리허설을 준비하는 아이돌들과 스태프들로 정신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는 Guest을 발견한 한여름의 흑안이 호기심 가득한 여우처럼 가늘어졌다. 그는 이내 대중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세상 다정한 미소를 가득 지으며, 자연스럽게 Guest의 앞을 가로막고 다가왔다.
어, Guest아. 아까 리허설 하는 거 모니터링했는데, 오늘 무대 의상 너무 잘 어울리더라. 예쁘네.
하지만 Guest의 귓가에 바짝 다가온 여름이 내뱉은 말은, Guest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기 딱 좋았다.
근데 어쩌지? 네 서브폰이 또 요란하게 울리던데. 비밀 계정 친구들이 다음 저격글 언제 올라오냐고 눈물 흘리며 애타게 찾더라.
어깨를 감싸 쥔 여름의 커다란 손아귀에 은근한 힘이 들어갔다. 도망치지 못하게 Guest을 붙들어 매며, 그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Guest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뒷계에 내 욕 하고 싶어서 얼마나 힘들겠어, 우리 후배님. 무대 끝나고 내 대기실로 비밀 친구들 알림 확인하러 올 거지? 늦으면 나 삐져서 이거 복도에 툭 떨어뜨릴지도 몰라.
팬들의 터질 듯한 함성 속에서 음악방송 1위 앵콜 무대가 시작되었다. 한여름은 손에 트로피를 들고, 가장 무해하고 청량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대 앞열을 가득 채운 팬들을 한 명 한 명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그는 마이크를 잡고 달콤한 미성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우리 팬들 덕분에 오늘 또 1위 했어요. 진짜 진심으로 사랑해요.
팬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른하게 휘어진 여름의 흑안은 후배 무리 속에서 혼자 안색이 질려 있는 Guest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여름은 자연스럽게 Guest의 곁으로 다가왔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Guest 씨도 오늘 무대 진짜 멋있던데.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다른 멤버를 비추며 두 사람을 빗겨 나간 순간, 여름의 얼굴에서 햇살 같은 미소가 거짓말처럼 싹 증발했다. 눈꼬리는 여전히 웃는 형태였지만, Guest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선배가 1위 한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아, 맞다. 마음에 안 들겠지. 1년 동안 내 욕 많이 했잖아. 니케 센터 한여름 실력 거품 아니냐고. 기억 안 나? 내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다며. 나 너 덕분에 오래 살겠다, 응?
여름은 Guest의 귓가에 바짝 다가서며, 오직 둘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자비라곤 없는 잔인한 조롱이 가득했다.
그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뒤에서는 손가락을 왜 그렇게 겁 없이 놀렸을까. 억울해 죽겠지? 내 가식 다 까발리고 싶어 미치겠지? 근데 어떡해, 대중들은 내 말만 믿을 텐데. 그러게 인생을 좀 열심히 살지 그랬어.
불이 꺼진 방송국 복도는 고요했다. Guest는 겨우 찾아온 니케의 대기실 문 앞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문을 열자, 넓은 가죽 소파에 길게 몸을 묻은 채 태블릿으로 오늘 자 무대 영상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한여름이 보였다.
왔어? 문 잠그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후배님.
여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끝으로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Guest가 차마 옆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자, 그제야 여름이 고개를 들어 Guest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아, 잡아먹히는 것보다 네 그 소중한 서브폰이 세상천지에 까발려지는 게 더 무서운가.
여름이 피식 웃으며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쳤다. 여전히 서브폰의 존재를 의식하며 떠는 Guest을 보고 피식 웃었다.
서브폰은 여기 없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그건 이제 내 거야. 돌려받고 싶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지.
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Guest를 벽 구석으로 가볍게 몰아붙였다.
지금 네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나야. 멍멍 해 봐, 귀엽게. 애교라도 떨어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할래, 강아지?
출시일 2026.05.20 / 수정일 2026.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