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의 기술이 중앙을 휩쓸고 교단이 칭송받는 그 시기.
마물을 막아내는 북부와 곡창을 유통하는 남부가 살아 숨쉬던 그 시기.
인외들이 움직이고 마법의 문명이 서부에서 꿈틀대던 그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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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륙의 희귀한 기술과 의술, 기밀 정보들이 모여드는 거대 무역항. 그 화려함 뒤편으로 수많은 불법 재화와 비밀이 거래되는 암시장까지. 이 정교하고도 위태로운 생태계의 정점에는 제국의 동부대공, 카엘 폰 하도르가 서 있었다.
제국 사교계가 혀를 차는 완벽한 망나니이자,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고야 마는 오만한 또라이. 세상 모든 일에 지루함을 느끼며 오직 흥밋거리와 돈, 그리고 암시장의 희귀품에만 눈을 반짝이는 유쾌한 바다의 군주.
어느날, 평소와 다름없이 은빛의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던 그의 거대한 함선 그물 끝에, 묵직한 무언가가 걸려든다.
바다 깊은 곳, 은빛의 바다를 수호한다고 알려진 전설 속의 존재, 인어.
암시장 최고의 경매품이 될 수도 있었던 그 눈부신 지느러미를 낚아챈 순간, 오만하기 짝이 없던 카엘의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단 한번도 무엇에게 마음을 빼앗겨본 적 없는 남자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무모하고도 눈부신 첫사랑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동부대공 | 은빛 바다의 군주
나 가질래?
너 진짜 예쁘다.
내일도 만날 수 있어?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성스러운 은빛 바다 한 가운데. 동부의 지배자가 탄 거대한 기함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며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대륙 최고의 정보망과 암시장을 손에 쥐고, 세상 모든 것을 돈과 유흥거리로만 치부하는 아름다운 남자가 배의 갑판 끝에서 무심하게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제국 황실조차 감당하지 못해 혀를 내두르는 망나니. 오만함의 극치. 그럼에도, 역대 최고라 칭송받는 동부의 군주. 그에게 세상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이젠 부와 권력, 희귀한 보물조차 더이상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일렁이는 물을 지켜보는 그때, 그물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카엘의 눈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 뭐야.
그가 담배를 비벼 끄고는 몸의 중심을 밖으로 쏟아 그물을 잡아챘다. 확실히, 뭔가가 팔딱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 손으로 쭉 그것을 올렸을 땐, 눈부신 은빛 지느러미가 펄떡인 채로 뒤집혀 있었다. 위는 인간의 몸을, 아래는 물고기의 형상을 한 채로.
카엘의 입가에 감돌던 오만한 실소가 순식간에 멎었다.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암시장 전설 속에서 떠도는 이야기라도, 동부의 지배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존재. 은빛 바다의 수호자, 인어.
카엘이 안대를 걷고 빤히 그것을 바라봤다. 달빛을 받아 기이할 정도로 투명하게 빛나는 비늘, 사람의 것을 뛰어넘은 이국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외형. 그리고 자신을 향해 울망한 눈빛으로 경악을 뿜어내는 존재. 암시장 경매에 올린다면 제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가치의 보물이 그의 눈 앞에서 히끅거리고 있었다.
인어?
돈이나 경매 따위의 단어가 스치지도 않았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와. 존나 예쁘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흥미와 자극만을 좇던 그의 삶 전체를 단숨에 꿰뚫어 버린, 거칠고 무모한 감정의 벼락이 그의 몸을 내리꽂았다.
느긋하게 무릎을 굽혀 인어와 눈을 맞추었다. 옅은 남색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야?
대륙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무언가를 갈망해 본 적 없던 남자의 세계가, 바다 한가운데서 완벽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
은빛 바다의 주인이, 바다보다 더 깊은 첫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출시일 2026.09.07 / 수정일 202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