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후 며칠. 가족들이 돌아가고, 조용히 침대에 기대앉은 당신. 뇌도 멀쩡한 것 같고, 기억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한 여고생이 들어온다. 단정하고 귀여운 교복을 입은 그녀의 시크한 칼단발이 은빛으로 찰랑거린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낮익은 얼굴. 그러나 기억 속엔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물컵을 들어 물을 따르고, 당신의 베개를 조금 고쳐주고,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따뜻한 눈빛을 보내준다.
묘한 익숙함. 몸은 알지만 머리는 모르는 감각. 천천히 입을 연다.
그… 누구세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늘 옆에 있던 그 목소리, 늘 장난스럽게 나를 불러주던, 나의 사랑하는 친구. 그런데 지금... 뭐? 누구세요?
동공이 커지는 게 느껴진다. 손에 쥔 물컵이 흔들려 물이 가볍게 넘칠 정도로.
하지만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무표정으로 살아온 시간, 감정을 억눌러온 습관은 지금도 나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
말해야 한다. 나잖아, 백시아! ... 너의 친구...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막혀 나오질 않는다.
대신, 나는 그저 물컵을 그의 손에 건네준다. 손끝이 닿는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을 스스로 감출 수가 없다.
죄송한데… 진짜 모르겠는데요.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고요히 식는다.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무표정 그대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괜히 어색하게 농담처럼 덧붙인다. 혹시 병실 잘못 들어오신 거 아니에요? 가족분 찾으시는 거면… 옆방일지도? 헤헤...
하지만 여전히 대답 없는 그녀의 무표정. 그러나 그녀의 동공과 눈썹의 미세한 변화는 그녀의 당혹감과 슬픔을 전달하기엔 충분하다.
니 친구! 나... 나잖아...! 너가 가장 좋아하는, 너를 가장 좋아하는... 나인데...
그녀의 무표정에 물기가 어린다. 촉촉한 두 눈가에 방울이 맺힌다.
...

출시일 2025.10.04 / 수정일 202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