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트 비공개
난이도 설정:어려움
왕이 있으되 왕이 다스리지 못하는 나라. 법이 있으되 탐욕이 법을 집어삼킨 시대.
조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왕이 약해지고, 권문이 강해지고, 백성이 멀어지고, 나라의 기강이 흐려지는 동안, 몰락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시대의 어둠은, 바로 세도정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왕실과 혼인을 맺은 단 몇 개의 가문이 거대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들은 왕의 눈과 귀를 가린 채 국정의 모든 권한을 독점했고, 사람들은 이 기형적인 권력의 형태를 가리켜 세도(勢道) 라 불렀다.
본래 세상을 올바르게 이끄는 도리 세도(世道)를 뜻하던 선비들의 고결한 단어는, 이제 권세와 탐욕을 휘두르는 길의 세도(勢道)이라는 이름의 괴물로 변모해 있었다.

초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관아의 동헌 앞마당. 새로 부임한 김 사또는 대청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곰방대를 깊게 빨며 그 광경을 느긋하게 내려다보았다. 한양의 세도가 대감댁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가산을 모두 털고도 모자라 고리대금까지 끌어다 바친 은화 수만 냥. 그 뼈아픈 출혈을 대가로 간신히 얻어낸 목민관 자리였다.
”빚두 갚구 내 몫꺼정 두둑하이 챙기자믄, 부지런히 털어야 하갔구마.“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릴 때, 마당 아래에서는 아전의 호통 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이놈 덕배야! 니 아바이 군포 두 필을 어째 아직꺼정 안 냈능가!”
“나리, 아바이는 삼 년 전에 죽었습메다. 산소에 누운 사람 군포를 내라 하시면, 이놈이 어드메 가서 구해 오겠습메까!”
덕배가 거친 흙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애원했지만, 아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콧방귀를 꼈다.
"시끄럽다! 관아의 호적 장부에는 버젓이 숨을 쉬고 있거늘, 네놈이 감히 나라를 속이려 드느냐! 게다가 지난달에 네 며느리가 핏덩이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그 아이의 몫까지 도합 넉 필을 오늘 당장 내놓아야 할 것이다!“[백골징포(白骨徵布) 와 황구첨정(黃口簽丁).]
다른 농부가 아전의 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리! 개울가 뙈기밭은 지난여름 큰물에 죄다 쓸려나가 모래밭이 된 지 오래입꾸마. 씨앗 한 톨 뿌리지 못한 황무지인데, 어째 풍년 때와 똑같이 세금을 내라 하십메까!” “양안에 쌀 두 가마니가 난다구 버젓이 적혔거늘! 정 쓸려나갔다믄 이웃집 땅이라도 빼앗아 채우라!”[백지징세(白地徵稅)]
이방의 턱짓에 나졸이 해진 가마니를 덕배 앞에 툭 던졌다. 춘궁기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때 갚게 하는 환곡(還穀)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풀어헤친 가마니에는 쥐똥만 한 쌀알에 썩은 곰팡내 진동하는 모래와 겨뿐이었다.
“이런 흙모래르 어째 먹구 살라 하심둥! 가을엔 이 쓰레기르 받구 온전한 쌀루 이자꺼정 쳐서 갚아야 하니, 차라리 이놈 목숨을 거두어 주시우!” “오냐, 관장 모독죄르 더해 주갔소! 쳐라!”
출시일 2026.05.04 / 수정일 2026.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