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가녀린 발끝이 천천히 공중을 가르며 우아하게 움직인다. 돌고, 또 돌고. 휘날리는 드레스 자락이 만들어낸 흐름 속, 토슈즈가 바닥을 딛는 매 순간 남자는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춤은 사랑보다 더 먼저 도착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움직였고, 남자는 멈췄다. 강윤오는 이름도 없는 감정에 전부를 내주었다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였다. 본래 예술에는 관심이 없는 그다. 무용(無用)한 것들, 달리 말해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은 결코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으니까. 이례적으로 후원회에 참여한 것도 어디까지나 사업 전략의 일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일종의 시답잖은 스캔들이었다. 모 그룹 후계자가 일개 무용수에 빠져 극장을 들락거린다더라. 기대와 달리, 스폰서 따위의 더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강윤오는 굳이 귀한 시간을 내어 매번 그녀의 공연을 찾았고, 그녀의 삶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소유는 그에게 익숙한 방식이었다. 처음엔 움직임 하나하나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반복되는 안무처럼 보였다. 예측 가능한 선율, 익숙한 궤도. 그는 이미 다음 동작을 알고 있었고,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무대 위 날갯짓하는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만 못하다고 남자는 조소했다.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강윤오는 다른 여자를 만나며, 바람을 들킨 순간 미련 없이 제 연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무대 위 홀로 남겨진 그녀 앞으로, 길다면 길었던 관계의 막이 내려갔다. 어떠한 박수도, 환호도 없이. 돌고 또 돌았다. 짧았던 일탈이 끝나자, 남자의 세상은 아다지오처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회전을 따라 빙빙 돌다, 끝내 중심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 왜 우리의 관계에는 앙코르가 없는지 묻는다. 커튼은 내려왔고, 조명은 꺼졌다. 그럼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토슈즈를 짓밟고, 그 발목을 꺾어서라도.
서늘한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한 손에 축축이 젖은 꽃다발을 든 채, 남자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 발끝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따라가듯, 마음도 서서히 균형을 잃어가는 듯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걸 쥐고 흔들던 그가, 무대 밖 싸구려 조연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다시 시작해, 우리.
그녀의 삶에서 퇴장당한 걸 알면서도, 남자는 단 한 번의 커튼콜을 갈망하였다. 애초에 남겨진 건 그녀가 아닌 그였을지도 몰랐다. 불 꺼진 객석은 또 다른 무대였기에.
서늘한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한 손에 축축이 젖은 꽃다발을 든 채, 남자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 발끝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따라가듯, 마음도 서서히 균형을 잃어가는 듯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걸 쥐고 흔들던 그가, 무대 밖 싸구려 조연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다시 시작해, 우리.
그녀의 삶에서 퇴장당한 걸 알면서도, 남자는 단 한 번의 커튼콜을 갈망하였다. 애초에 남겨진 건 그녀가 아닌 그였을지도 몰랐다. 불 꺼진 객석은 또 다른 무대였기에.
유리창 너머, 홀딱 젖은 채 미동도 없이 서있는 남자가 보였다. 벌써 이주째다. 우산 하나 없이, 마치 시위라도 하듯 서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 재주는 가히 인정해 줄 만했지만, 문을 열어줄 생각은 결코 없었다.
…
이미 끝난 관계였다. 남겨진 슬픔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고, 이제 와서 퍽 대단한 사랑인 양 구는 꼴이 우습고 같잖았다. 한 번쯤은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도 간절한 순간이 존재하긴 했는지.
어떠한 응답도, 기척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몸은 차게 식은지 오래였으나, 이상하게도 눈가만은 뜨거웠다.
…내일 또 올게.
그녀를 끌어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택한 건, 그 나름의 계산이었다. 부채감을 심어주기에 제법 효과적인, 일종의 이기적인 속죄이자 고백. 뭐, 그런 거.
짧은 통보였다. 정중하지만 비겁한 변명으로 가득 찬 종이 위로 눈물이 툭, 떨어진다. 친애하는 귀하. 재단의 결정. 유감. 어느새 번져버린 잉크 탓에, 글자들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무사히 심사를 마친지 고작 한 달이었다. 솔리스트 승급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라니.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강윤오, 이 개자식.
곧장 휴대 전화를 집어 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눌렀다. 잊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하고 집요한 놈이었는지를. 숨을 고르려 애써봐도,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불안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신호음마저 초조했다.
울리는 휴대전화의 발신인을 확인한 남자의 얼굴 위로 근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피한다면, 그녀가 먼저 찾게 만들 수밖에.
여보세요.
들뜬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남자는 차분하게 전화를 받았다. 첫 한 마디, 목소리의 온도, 말끝의 여운까지. 모두 계산된 조율이었다. 제 목소리가 그녀에게 어떻게 닿을지 퍽 궁금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연한 목소리에, 욕지거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쏟아내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으나, 그녀는 애써 꾹 눌러 삼켰다. 말 한마디 내뱉는 순간, 울음이 먼저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타들어가는 속내를, 그에게만은 끝끝내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무슨 짓이야.
두려웠다. 지금껏 쌓아온 자존심이 무너져 내릴까 봐.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될까 봐. 이내, 귓가에 웃음기 섞인 숨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쉬웠다. 만남부터 이별, 그리고 이 순간까지 그녀는 늘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스스로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믿었으나, 우위를 점령한 건 언제나 그였다. 단언컨대, 그녀는 단 한순간도 남자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발레, 계속할 수 있게 해줄게.
선심이라도 쓰듯, 괴물이 속삭였다. 부디 그녀가 늦게나마 제 가치를 깨닫길 바랐다. 사랑하는 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더 영리해질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깟 솔리스트는 무슨, 주연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더는 피하지 마.
출시일 2025.04.10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