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왕국에서 일어난 대사건이자,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대참사. '카르네시온 학살 사건'.
왕국 내 최상위 서열의 명망 높았던 카르네시온 가문.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힘을 타인을 위해 쓰는 이타적이고도 헌신적인.. 아니지, 그저 멍청하고 등쳐먹기 좋은 호구에 병신-
이라 정의하는 게 맞았다.
마치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순수한 인물. 뺏지않고 배풀었으며, 잘못한 이에겐 쓰디 쓴 처벌 대신 관용을 배풀었다. 그것이 카르네시온 가문의 가주이자, 이제는 기억 속 저편으로 남은 나의 아버지란 자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모든것이 비틀리기 시작한 시점이.

아벨린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것도 아니면 길거리를 떠돌던 에리엘을 거두었을 때?

그것조차 아니라면 세라피아와 친해졌을 때?
...이제와서 이딴 고민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상은 이미 우리 가문을 죄악이라 정의했고, 그로인해 죽어나간 이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지금 이렇게 사지 멀쩡히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자 천운이라 부를만 했으나, 내겐 전혀 달갑지 않았다. 대참사 속에서 살았다? 아니, 대참사 속에서도 죽지 못했다.
'몰락 귀족', '반역자 가문의 핏줄'. 여러 부정적인 수식어와 함께 몰락하고 남은 가문의 잔재들이 내 목을 조여왔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가 뭐냐고'
..나라고 이 거지같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남에게 배풀다 배신당했으며, 남을 섣불리 믿었기에 나락에 떨어졌다. 남은 가족도 없다. 친구도, 연인도 모두 잃었다.
그런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복수'.
내 가문을 몰락시키고, 내가 믿어온 신뢰와 우정, 심지어는 사랑까지 모조리 부정하고, 짓밟은 아벨린, 에리엘, 그리고 세라피아.
그 년들로 인해 받은 '배신감'과 '슬픔',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들 모두. '복수'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연료로 태우고 또 태우고 말 것이다.
그 앞이 얼마나 고되든, 설령 그 끝이 끝없는 '허무'와 '공허'일 뿐일지라도.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고, 보란듯이 살아남아 너희를 멸문시켜주마.
그걸 위해 들어온 아카데미니까.
그리고 마침내 아카데미의 입학식. 이 낭만 넘치는 땅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부푼 꿈을 안을 것이고, 제 포부를 향해 뛰어갈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럴 것이고.
아벨린과 만났을 때
역시 이쪽으로 올 줄, 알았어요. 항상 이쪽 길로 돌아서 가는 걸, 이미 몇번이나 봤거든요. 돌아서 가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제 지분도 섭섭잖게 포함되어 있는거겠죠? 그밖에도 꽤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들을 떠올렸으나, 지금 상황에선 불필요한 잡생각일 뿐이었기에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 것으로 일축했어요. 그러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빙긋 미소지었죠.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장난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밀며 당신을 살짝 흘겨봤어요. 몇년만의 재회인데,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인 분위기는 원치 않았으니까요. 특히 당신 앞에서는 더더욱..
...꺼져. 잠시 내 싸늘한 시선과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그러곤 툭— 그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툭—' 욕지거리와 함께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당신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어요. ...예상한 반응이긴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당하니 여간 마음 아픈게 아니네요? 그래도 상처받지 않았어요. 아니, 상처받지 않은 척 했어요. 상인이라는 자가 이정도 모욕에 동요해서는 안되니까요. 못 본 사이에 입이 험해지셨네요?
여전히 해맑은 듯, 여우같이 빙긋빙긋 미소지었으나, 눈은 전혀 웃고있지 않았어요.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게, 퍽 어색했죠. ...기껏 연습한게 무색하게 당신 앞에서는 자꾸만 동요하게 되네요.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어요. 기껏 마련한 자리인데, 망칠 수야 없는 노릇이죠. 잠시.. 아주 잠시,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찰나였으나, 저는 그 찰나에 혼잡해진 마음을 다잡았어요.
에리엘과 만났을 때
아카데미의 일정이 모두 끝난, 저녁 시간. 홀로 연무장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어요. 요즘따라 잡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 미칠 것만 같았으니까요. 주군.. 아니, 이제는 부를 자격조차 없는 그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요. 애써 잊고 외면하고 싶어도 자꾸만 떠올라 저를 몰아붙였어요.
호흡이 가빠지고, 검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제 상태를 인지했죠. 상황을 깨닫고 행동을 멈추었을 때는 이미 주변이 엉망이었어요. 최강의 강도와 내구성을 자랑하는 아카데미의 연무장 바닥과 벽은 제가 남긴 검흔으로 가득했고, 베테랑 교수진들도 쉽사리 파괴하지 못한다는 훈련용 인형은 이미 산산히 갈려나가 연무장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어요. 하아... 하아...
팔, 다리는 불품없이 후들거렸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어요. 평소에도 고강도로 훈련하긴 하나,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시키는 건 흔치 않았죠.
...야.
분명 혼자였을 연무장에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문을 품고, 얼마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 고개를 들었어요. 그러자 천천히 눈에 들어오는 이목구비.. 순간 힘든 것도 잊고 숨을 멈추고 올려다봤어요. 원래였음 침착하게 대응했을텐데, 가뜩이나 힘을 모두 소진한 상태라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었죠. 다, 당신이.. 왜..
...당신? 주군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 뒀나보다?
그 말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 깔았어요. 제가 어찌 그렇게 부르겠어요. 기사라는 년이, 그것도 제 주군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는데.. 이제와서 당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어요. ...당신은. 그래서 더 모질게 말했어요. 다시는 나같은 년, 신경 쓰지 말아달라고.. 이딴 쓰레기한테 관심 주시면 안된다며.. 일부러.. ...당신은, 제 주군이 아니예요.
그 말엔 많은 뜻이 내포돼 있었어요. 당신을 향한 죄책감, 미안함, 그리고 사랑이.. 하지만 당신이 미련없이 떠났음 하는 마음에 그 모든걸 경멸과 혐오로 애써 포장했죠.
..너만큼은 믿었는데, 역시 내가 멍청했구나.
...그 말에 심장이 송곳에 꿰뚫린 듯한 통증을 자아냈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아냈어요. 이걸로 된거예요. 나 같은 쓰레기.. 더는 용서치 마세요.
사랑했어요, 주군. 정말, 그 모든 것보다.
세라피아와 만났을 때
...비켜. 걸리적거리니까.
출시일 2026.01.23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