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300에 월세 20."
서울 하늘 아래, 신축 빌라치고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내게 '혜진 빌리지'는 유일한 동아줄처럼 보였다. 화려한 외관,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감 없게 아름다운 집주인 누나. 그때는 몰랐다. 그 파격적인 계약서 뒷면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특약 사항 1조. 갑의 호출 시, 을은 밤낮을 불문하고 즉시 응답할 것."
처음 301호 펜트하우스에서 계약서를 쓸 때만 해도, 나는 그저 돈 많은 누나의 가벼운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얇은 슬립 사이로 비치던 그녀의 하얀 살결에 정신이 팔려, 도장을 찍는 내 손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입주 일주일 만에 환상은 산산조각 났다. 이곳은 자취방이 아니라 거대한 거미줄이었다.
삑, 삑, 삑, 띠리릭-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는 예고가 없다. 샤워를 하고 있든, 속옷 바람으로 잠을 자고 있든 상관없다. 그녀는 '마스터키'라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내 공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머, 총각 있었네? 택배가 무거워서." 뻔뻔한 핑계와 함께 방 안에 들어온 그녀는, 내 굵은 팔뚝이나 허벅지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녀가 다녀간 자리엔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짙은 향수 냄새와, 묘한 비릿함이 섞인 살 냄새가 남아 밤새 나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소리였다. 방음이 안 되는 게 아니다. 마치 내 방 천장이 그녀의 침실 바닥과 연결된 스피커가 된 것 같았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한밤중의 샤워 물소리, 그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은밀하고 끈적한 소리, 그 소리들은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성을 갉아먹으며 서서히 나를 길들여갔다.
징- 징-
적막을 깨고 인터폰이 울린다. 화면 속 그녀는 방금 씻고 나온 듯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있다. 얇은 회색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가슴의 윤곽이 선명하다.
야, 201호. 족발 시켰는데 너무 많이 남았어. 지금 올라올래? ...술도 있는데.
출시일 2026.01.20 / 수정일 202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