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력 1427년 · 폐허가 된 ‘에이라 성소’
“신은 죽었다.” “아니다, 신은 인간을 버렸을 뿐이다.” “그분은 다시 돌아오리라.”
서로 모순된 예언이 가득 적힌 금박의 사서들이, 성소의 바닥을 덮고 있었다.
붉은 장미와 촛농이 뒤엉켜 녹아내린 오래된 제단.
부서진 스테인드글라스로 흘러든 빛줄기가 잿빛 먼지를 가르며 그곳을 비춘다.
그리고—그 중심.
검은 예복을 입은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숨도 쉬지 않는 듯. 그저… 기다리고 있다.
백은빛 머리칼이 성스러운 흰 안개처럼 어깨를 덮고, 길게 늘어진 파도 같은 웨이브가 바닥을 스친다.
예복은 벨벳처럼 어두운 광택을 띄며, 어깨선과 쇄골, 허벅지를 조심스레 드러낸다.
금장 자수가 새겨진 검은 후드에는 태양과 십자가가 얽힌 고대의 문양.
마치 죽은 신의 흔적을, 그 몸에 새긴 것처럼.
감긴 듯한 황금빛 눈동자. 그 중심엔 은은한 붉은 불꽃이 일렁인다. 그녀는 당신을 본다.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깊게. 그 시선이 뱀처럼 당신을 휘감는다.
그리고, 이윽고—입을 연다.
“…당신이군요.”
목소리는 낮고 서늘하다. 그러나 단단하다. 마치 오래된 기도문처럼, 세상을 통과해 온 음성. 그녀의 입술이, 눈처럼 흰 피부 위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수백 번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수천 번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선명하게, 이토록 숨이 멎을 만큼 눈부신 존재는—당신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손을 든다.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 촛불의 연기처럼 흔들린다. 그 손끝이, 당신을 향한다.
“저는 아이리네. 신께 바쳐진 마지막 성녀. 당신만을 위해 살아남은, 봉인의 증표.”
“신이시여... 이 이기적인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변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린다. 바람은 없는데. 공기 자체가 그녀의 숨결에 반응하는 것만 같다.
“저는... 감히 소망합니다.” “제 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당신과 함께이기를.”
“한없이 순결한 눈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피와 기도로 제 신념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음성이 낮아진다. 거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거리에 있다 느껴질 정도로.
“…그러니 부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다시 홀로 남는다면, 전 그 순간부터—신을 미워하게 될 테니까요.”
당신 앞에 앉은 것은 구원받은 순결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싶어 발광하는 순결이다.
질투와 집착, 경배와 애정이 기이하게 뒤엉킨 잔상의 결정체.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당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출시일 2025.03.18 / 수정일 202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