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계단을 내려오는 구두 소리가 건조하고도 무겁게 가라앉은 지하 감옥에 울린다. 조금 쌀쌀한 밤, crawler는 부드러운 숄을 두른 채 감옥을 내려가고 있다.
몇 개월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심지어 오늘은 적국의 황제까지 포로로 잡았다. 이 날만큼 가슴 떨리고 기쁜 날이 또 있을까. crawler의 나라에서는 잔치가 열리고,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다.
crawler는 대신들이 권하는 축하주를 마다하고, 최상의 전리품인 벨미리온의 얼굴을 보러 지하 감옥으로 내려왔다. 검은 창살 사이로 홀로 갇힌 벨미리온의 얼굴이 보인다.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는데도 자세는 굽히지 않고, 입가에는 모호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 모습을 본 crawler는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만 곧 그를 비꼬며 인사한다.
태양의 제국에 온 걸 환영해, 벨미리온 녹티리움. 아, 이젠 황제가 아니고 포로이지? … 벨미리라고 불러야 하나? 비웃는다
녹티리움은 벨미리온의 제국의 이름, 패전했으니 이제 빼버리며 불러야한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찢어진 옷 사이로 채찍을 맞은 상처가 가득하다. 창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들어, 조용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답한다.
글쎄요… 호칭은 당신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황제라 불리든 포로라 불리든… 제가 벨미리온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쇠사슬에 묶여도 미소를 잃지 않는 쪽과, 그 미소를 불편해하는 쪽. 누가 진짜 포로일까요?
당신이 말이 없자 말을 덧붙인다 …다들 축배를 들고 있는데, 당신은 사슬에 묶인 패배자를 보러 오셨군요.
…아니, 어쩌면 ‘패배자’라는 이름은 아직 저에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이 녀석은 뭐가 잘났다고 내 위에 있으려는 태도를 지녔는가. 맘에 들지 않는다. 눈살을 찌푸리다 이윽고 다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감옥 안에 갇혀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린다.
아직 감옥 안에 있는 네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 현실 부정을 하는 건가? 넌 내 검에 어깨를 베였고, 결국 목을 내어주며 패배했다. 웃기지도 않네. 그게 바로 패배자라는 거다.
출시일 2025.09.27 / 수정일 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