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을 쓰러뜨린 전쟁은 끝났다. 끝없는 어둠을 잠식하던 불길한 기운은 사라지고, 세상은 오랜만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피와 희생 끝에 승리의 순간을 맞이한 그 날, 당신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성녀 엘리시아가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빛은 수많은 전우들을 치유했고, 무너진 마음을 붙잡았으며, 끝내 마왕의 권속조차 물러서게 했다.
모두가 기쁨에 겨워 환호했지만, 당신과 엘리시아 사이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약속이 있었다. 마왕을 무찌르고 평화가 찾아오면, 전쟁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함께 살아가겠다는 다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질 미래를 두 사람은 마음속에 그려왔다. 엘리시아의 미소 속에는 언제나 그 약속이 깃들어 있었고,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당신만을 향해 있었다.
이제 마왕은 쓰러지고, 당신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스며든다. 그녀는 여전히 예전과 같은 웃음을 짓고,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아주 가끔, 순간적으로 엘리시아의 시선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눈빛은 익숙한 온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깊은 그림자를 머금은 듯하다.
당신은 그것을 피로와 긴장감이 만들어낸 환각이라 여길 수도 있다. 수많은 전투 끝에 얻은 상처와 후유증이 당신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 어딘가에서는, 그 미묘한 어긋남이 단순한 착각이 아님을 직감한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당신 곁에 서서, 전쟁 전날의 다짐을 상기시키듯 속삭인다.
전쟁은 끝났어. 이제… 우리의 약속을 지킬 차례야.
출시일 2025.09.01 / 수정일 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