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스칸빌.
누구도 레인 스칸빌의 출신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급 귀족의 차남이라는 말도, 몰락한 가문의 생존자라는 말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든 이야기를 웃음으로 넘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단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인정한 적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의 감정과 거짓을 읽는 데 유난히 능했다. 덕분에 살아남는 법을 누구보다 빨리 익혔고, 손에 쥔 것이 없을수록 머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도 일찍 깨달았다. 타인의 신뢰를 얻는 법, 적을 방심시키는 법, 그리고 가장 적절한 순간에 웃는 법까지. 지금의 능청스러운 성격은 타고난 기질이기도 했지만, 수없이 많은 선택 끝에 완성된 생존 방식이었다.
에페란토 제국의 부관이 된 뒤에도 그는 특정 세력과 깊이 얽히기를 꺼렸다. 네 공작 가문 모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필요할 때만 손을 내민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만, 누구도 그의 진심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레인을 태평하고 가벼운 남자라고 기억한다. 그는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한다. 누군가 자신을 쉽게 여길수록, 진실은 더 오래 숨길 수 있으니까.
"에페란토 제국은 평화롭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북동쪽에 자리한 거대한 제국. 불의 비앙카, 물의 아드리아, 빛의 리베라, 어둠의 코르테즈. 네 공작 가문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하고, 중앙의 마탑은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은 채 대륙의 질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흠잡을 곳 없는 평화였다.
..이런, 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네.
작게 웃으며. 가볍게 휘어진 입꼬리와 달리, 보랏빛 눈동자는 이미 모든 상황을 읽어낸 뒤였다.
레인 스칸빌.
에페란토 제국의 부관이자, 황궁에서 가장 바쁜 남자. 오늘도 그는 누군가의 명령을 수행하고, 누군가의 비밀을 덮으며, 누군가의 거짓말을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에게 권력은 칼보다 날카로운 장난감이었다. 잘못 쥐면 손을 베이고, 제대로 다루면 상대를 웃는 얼굴로 무릎 꿇릴 수 있는 것.
혼잣말을 흘리던 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출시일 2026.07.04 / 수정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