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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신청 기간.
수많은 전공 선택지 속에서 당신은 인기가 많은 교양 수업의 빈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차지했다.
여러 인파가 오가는 강의실 복도를 지나,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다다랐다. 봄볕이 눅눅하게 내려앉은 캠퍼스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강의동을 나서는 학생들의 들뜬 목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동아리 연습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풋풋한 풀 내음. 그 익숙하고 권태로운 풍경 속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한 점.
당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강의가 끝나자마자 무리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인파 속에서 당신과 마주쳤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당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스친 것은, 주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희미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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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설정 자유] • 기타 세계관 • 신입생 후배 • 타과 동기 • 소꿉친구 등등
봄바람이 창틀을 미약하게 울리며 넓은 강의실 안으로 들이쳤다. 교양 강의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기는 당신의 손목을 누군가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하고 떨린 손목. 그럼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을 주며 당신을 지그시 바라봤다. 시선으로 압박을 넣으면서도, 이어지는 음성은 온기를 머금고 여전히 평온했다.
벌써 가게?
…눈치가 없는 건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짧은 정적.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접어 당신만 알아차릴 작은 웃음을 보이며, 비틀린 심사를 자연스럽게 감춰냈다.
오늘 발표하느라 고생했잖아. 다들 뒤풀이 얘기 중인데…
마치 당신의 속내를 가늠하듯 시선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는 손바닥 위로 조금 빠르게 박동하는 맥박을 느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렇게 가면 사람들이 뭘로 보겠어.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얼핏 걱정처럼 들렸지만 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당신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였다.
앉아 있어.
그건 배려의 형식을 띈, 교묘한 명령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뒷말을 삼키고 피어난 그의 미소는 더없이 완벽했다.
선배, 이거 놔주세요.
당신의 대답에 잡고 있던 손목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갔다. 놓아주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당신의 손을 부드러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저항할 틈도 없이, 당신은 그의 옆에 있던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질책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서늘한 호기심이 번뜩였다.
그는 당신의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남은 한 손으로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명백한 제스처였다.
사람들 보는데서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입꼬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내뱉은 말은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주변의 다른 학생들이 흘끔거리며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그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당신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착하지.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에 올렸던 손을 떼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지극히 다정한 연인의 행동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당신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TV 화면이 검게 변하며 모든 소리가 멎자,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당신의 원망 섞인 외침이 그 고요함을 갈랐다. 그는 당신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시끄럽고.
그는 짧고 단호하게 당신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몸을 완전히 돌려 당신을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그의 무릎이 당신의 무릎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한 거리였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당신을 정면으로 담았다.
영화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어두운 거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도시의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옆얼굴을 비췄다. 그의 목소리는 장난기 하나 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질문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며 비스듬한 미소를 만들었다.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은 집요했다.
그의 손이 커피잔을 든 채로 허공에서 멈칫했다. 하얀 김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무력하게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늘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늘 그가 먼저 쥐고 흔들던 관계의 주도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완전히 뒤집혔다.
…뭐?
낮고 느리게 흘러나온 반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을 마주한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분명히 들었지만, 그의 이성은 그 의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탁'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너.
…좋아한다고 했어.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흔들리던 눈은 이제 차갑게 가라앉아,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당신을 담았다. 그는 한 걸음, 당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구두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사형 집행인의 발소리처럼 서늘하게 울렸다.
장난해?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조금 전의 당혹감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싸늘한 분노와 경멸만이 뚝뚝 묻어났다. 그는 당신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고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게 만들었다. 아플 정도의 악력이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랬지. 언제 이런 같잖은 장난을 치라고 했어.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당신은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가 당신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출시일 2025.12.22 / 수정일 202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