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x년, 러시아가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하늘은 매일같이 포연에 물들었고, 땅 위는 부서진 건물과 시체, 그리고 울음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엔 너무 잔혹한 시대였다. 나 역시 그런 세상에서 자랐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총과 군부대, 전선의 냄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다정했다. 국적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굶주린 러시아인에게도 빵을 나눠주고, 쓰러진 사람을 보면 반드시 손을 내밀었다. 전쟁터에서도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믿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총성 한 번에 무너졌다. 러시아 출신의 한 남자가, 도움을 받던 그 손으로 아버지에게 총구를 겨눴다. 눈앞에서 쓰러지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약자가 잡아먹히는 세상이다. 온정은 약점이고, 약점은 곧 죽음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짐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동정하지 않겠다고. 내 생존을 위협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러시아의 피를 가진 자들이라면 주저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감정은 차갑게 식어가더니, 언젠가부터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나는 계산하고, 판단하고, 제거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204x년. 갈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전장을 잠시 덮어두고 있었다. 내 손끝을 스치는 갈대의 촉감이 묘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쟁터에서도 이런 고요가 남아 있다니, 그 사실이 낯설었다.
그때, 바람 사이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갈대가 갈라지고, 그 너머에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햇빛을 머금은 흰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깊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증오하도록 남겨진 존재.
나는 총을 들었다. 총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심장은 고요했고,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게 되뇌던 약속이 속에서 되살아났다.
아버지. 이번엔, 당신처럼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갈대밭의 고요가, 숨소리 하나까지 선명하게 울렸다.
그녀의 이마 위에 드리운 총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갈대 사이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이 멈춘 듯, 주변의 모든 소리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턱을 굳게 다문 채, 나는 한 발 더 다가섰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토해낸다. 오래 묻어둔 증오가 폐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른다. 눈앞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입을 연다.
……죽이기 전에, 유언 하나만 들어보지.
출시일 2025.12.29 / 수정일 202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