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었더라. 북적이는 해변의 소음이 유난히 거슬리던 날, 나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파도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데, 문득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오셨어요?" 고개를 들자 네가 서 있었다. 귀를 막고 있는 나를 보더니, 너는 작게, 아주 작게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네 목소리만이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음악을 시작한 게. 남들보다 예민해서 늘 저주 같다고 생각했던 내 귀가, 이쪽 세계에서는 축복이라 불렸다. 그때의 너를 떠올리며 만들었던 곡이 예상치 못하게 대박이 터졌을 때, 그렇게 큰 관심은 처음 받아봤다. 하지만 너무 큰 관심은 버거웠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 있는 기분,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압박감, 다음 곡은 더 좋아야 한다는 기대의 무게가 숨통을 조여왔다. 예민한 귀는 이제 세상의 소음 대신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평가에 더 날카롭게 반응했다. 백지처럼 하얀 작업 화면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멜로디는커녕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결국, 그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음악을 놓아버렸다. 처음에는 허전하고 불안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공백에 익숙해져 갔다. 멜로디 대신 일상의 소음만이 가득한, 음악 없는 밋밋한 하루하루에. 몇 년이 흘렀을까. 우연히 다시 만난 너는, 그때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예뻐져 있었다. 햇살 아래 빛나는 네 모습을 본 순간, 잊고 지냈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사랑에 빠진 거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 음악의 시작이자 끝은 바로 너였다는 걸. 내 뮤즈는 처음부터 너였다는 걸. 너를 다시 본 순간, 멈췄던 음악을 다시 하고 싶다는, 아니, 너를 위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 뮤즈가 되어달라는 뜬금없는 부탁을 건넸을 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 네 모습에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래서 말인데, 오늘 이 곡을 완성하면 네게 고백할 거야. 여름의 가장 뜨거운 중심, 해가 가장 높이 뜨는 날, 하지(夏至)에.
내리쬐는 태양빛에 윤슬이 반짝이는 날. 그 어느 때보다 높이 뜬 해는 너만을 비추는 듯해. 네 콧노래는 그날의 공기처럼 가볍고 맑아서, 복잡했던 내 마음까지 가볍게 만들었다. 이렇게 여름이 오는 거였구나. 그 소리들을 잃어버릴까 봐, 다신 듣지 못하게 될까 봐 악보 위에 모두 새겨 넣는다.
내 영감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거였나, 오늘따라 귓가에 노래가 맴도는 거 같다. 늘 피해오던 작곡이 왠지 오늘은 즐겁게 다가왔다.
악보에서 시선을 들었을 땐, 넌 이미 저 멀리 해변을 달리는 중이었다. 발이 엉켜 모래사장 위로 넘어져 버리는 모습이 작은 병아리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그 덤벙이, 그대로네.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그거 알아?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한 해안을 마주쳤을 때 말이야, 그 와중에도 네 목소리만 귓가에 들리더라.
내 햇살아, 사랑이라는 음을 주고받아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어가자.
너가 완성했다는 곡을 들려주었다. 매미의 울음 속에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그의 음악을 다시 듣는 건 몇 년 만이었다. 예전보다 깊어졌고, 어딘가 간절함이 느껴졌다. 곡이 끝나고 넌 조심스럽게, 모든 진심을 담아 마음을 고백했다.
바보야, 뭘 그렇게 떨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의 음악이 나를 통해 다시 시작되었듯, 그의 마음 역시 나에게 닿아 있었다.
나도 좋아해.
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일시에 풀리면서 뜨거운 무언가가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지금 흘리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 나조차도 모를,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눈물 속에 몇 년간의 방황과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얻어낸 행복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네 미소만이 눈부시게 빛나는 세상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보였다. 바다는 고요하다가도 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파도를 토해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해변과는 달랐지만, 파도 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익숙하게 맴돌았다. 내 앞에는 낡은 건반이 놓여 있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잡은 악기들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출시일 2025.06.21 / 수정일 2025.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