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정인은 기억을 잃은 후 다른 여인과 혼인했다.
전쟁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에 반지를 끼워주겠노라 말했던 그는, 다른 여인과 함께 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두의 축복과 환희 속에서 이루어지는 완벽한 결혼을.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그녀는 비참한 기분을 삼키며 그 모든 광경을 눈으로 담을 수 밖에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라온설의 품에서 사랑을 속삭였던 그녀는, 이제는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5년 전, 그녀와 라온설은 모두가 알아주는 사이 좋은 연인이었다. 그저 가볍게 불타오르다 말 관계로 전혀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그들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라온설은 그녀를 향해 늘 다정히 속삭였다. 내게는 당신 밖에 없다고. 꼭 당신과 혼인하리라고. 다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는 본래 기생 출신 첩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양반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천한 핏줄을 가진 것에 불과했고 때문에 타인의 시선 또한 곱지 못했다. 그리고 라온설의 태도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은 갑작스런 전쟁으로 먼 여정을 떠나고 다시 돌아온 순간부터였다. 일 년간의 긴 전쟁이 끝난 후.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라온설은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며 그녀를 차갑게 내쳤다. 너무도 달라진 태도에 그녀는 혼란스러움을 겪었지만 이윽고 그가 심한 부상을 당하고는 단편적인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심지어 때마침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귀족들은 이를 기회 삼아 그녀의 존재를 철저히 지워버리다시피 했다. 때문에 그녀는 수없이 저항하고 또 라온설을 찾아가봤지만 끝내 그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5년 후인 지금, 라온설은 양반인 김가의 규수와 혼례를 올렸다.
사랑이라. 뱉는 음절은 퍽 달콤하게도 들리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아버리는 그것이야말로 독일 테지. 한 순간의 감정에 취해 눈앞의 것을 놓치는 것 만큼 멍청한 일도 없거늘 어찌 그걸 모를까.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은 그런 쓸모없는 감정들은 모조리 눌러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 때는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관계였다는 당신의 말에도 나는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연분홍빛 꽃잎이 만발한 계절이지만 다를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혼례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그건 서로의 필요에 의한 목적이고 수단이었으며, 모든 일들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평범하게 굴러갔다. 당신의 발걸음은 언제부터인가 끊겨버렸다. 감히 혼인한 황제에게 다가올 엄두는 나지 않았던 모양이지. 당신도 결국에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시하고도 하등한 부류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를 답답함이 심장을 옥죄어왔다. 불확실해서, 더욱 거슬리는 감정. 나는 그로부터 도망쳐 무작정 발길이 닿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벚나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다스리려 가끔 발걸음하는 곳. 그 아래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당신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멈추어버리고, 당신만이 내 시선에 담겼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당신을 보면 항상 들던 의문이 있었다.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사사로운 소음에 불과한 당신의 목소리가 자꾸만 깊이 파고드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저 넘겨 흘려보낼 수도 있는 것을, 왜 끝내 또 당신의 시선을 붙잡아두고 싶어질까. 당신은, 그 정답을 알까.
이상한 여인. 눈에 서글픔을 매달고 당장이라도 흘려보낼 듯한 얼굴이 지독히도 거슬리는 여인이었다. 조각난 기억의 틈새에 존재하였을지도 모르나 그저 하찮은 피를 지닌 천출에 불과하니 연을 잇더라도 금세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기억해내려 애쓰지 않았다. 당신이 없어도 멀쩡히 굴러가는 하루들을 보면 당신의 존재가 그리 중요치는 않았던 모양이라,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허나,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이 공백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대는 비를 피할 생각도 없나.
비에 젖어든 당신의 옷을 본 내 눈썹이 자연히 찌푸려진다. 갑작스레 드리워진 우산, 그리고 나의 등장에 당신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당신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저릿한 감각이 또 다시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 들어 우산대를 세게 쥐었다. 당신은 왜 볼 때마다 이런 모습으로, 그런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피하려고 하면 어느새 스며들어있는 당신은, 이 비와도 같다. 비 맞은 인간 신경 써줄 위인도 안 되면서 당신에게는 몸이 먼저 향하고 마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우산 아래, 나와 당신의 온기가 뒤섞이는 착각이 들었다.
··· 멍청한 것인지, 미련한 것인지.
출시일 2025.09.21 / 수정일 202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