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문의 고요함이 마침내 깨어지고, 경직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로, 중인에 불과한 집안에 팔려나가듯이 혼례를 치르는 꼴을 여실히 보여주듯, 초라한 그녀의 낯 위로 햇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비스듬히 기대어 서 그 광경을 조소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신랑의 동생이 되는 사내, 백윤도. 허영에 허덕이듯 준비한 혼례가 요란하게 이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줄곧 형수가 될 여인을 좇고 있었다. 그리고 초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상기되어있는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형님의 아내가 될 미련한 여인이 대체 누구일까, 잠시나마 호기심을 가졌던 자신을 비웃으며 사내는 형수님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매일 같이 기방을 들락거리고, 방탕한 생활을 눈치도 보지 않고 이어가는, 형님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그 자식의 아내가 되는 불행한 삶을 짊어지는 여인을. 윗놈들의 예법을 흉내 낸답시고 허둥거리는 형님에게 던지는 시선을 끝으로, 이만 돌아서는 그의 실룩거리는 입꼬리에 머금은 감정은 조롱, 희열, 알 수 없는 해방감, 그리고… 미약한 연민이었다. 혼례를 치르고 보름 정도가 지났을까. 지고지순하고 점잖기 이를 데 없는 형수님이 어느새 지겨워졌는지, 그놈의 추잡한 습관은 다시 시작되었다. 술기운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아내를 밀치며 난동을 부리고, 출신도 모르는 여자들을 데리고 와 시시덕거려도, 형수님은 연신 그놈을 ’서방님‘이라 부르며 울먹거리기만 하였고, 백윤도는 그 꼴을 우습다는 듯이 관조하였다. 허나 비극적인 하루가 반복될수록 그에게도 하나의 의문이 돋아났다. 왜 하필 저 여인이어야 했는지. 저 무죄한 여인 곁에 서 있는 사내가 왜 자신이 아닌, 형님이어야 했는지. 제대로 된 대접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형수님을 버티게 하는 것은 책임감인가, 혹은 제 비운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아둔함인가. 그는 옅게 퍼지는 쓴웃음과 함께 번민을 떨쳤다. 모두가 덧없는 짓이라 치부하며.
형님의 애정을 갈구한다고 했던가요. 피를 토해내듯 붉게 피어난 애상은 한 폭의 고독이라, 응답 없는 연심을 기워내듯 품는 처량은 한 가닥의 희망이라, 지고지순한 여인의 애달픈 마음을 즈려밟는 사내의 뒷모습을 한없이 증오했습니다. 그대의 곧은 시선이 형님을 따르는 순간, 터져 나오는 배덕감에 휩싸여 여린 살결에 손을 뻗는 이 육신을 자조했습니다. 내가 이리 천하고 추접스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내였구나.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 자식의 취향이 뭔지. 우리 바보같은 형수님은, 포기라는 걸 모르시니.
오늘도 저 여인은 형님을 기다릴 작정인가. 굳게 닫힌 입매에 비치는 외로움에 닿았던 시선은, 허공을 응시하는 젖은 눈동자에 다시 머문다. 고상한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비루한 꼴로,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 그놈에게 아직 마음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무어냐고, 잠시나마 품었던 의문은 무결한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잠적해 버리고, 어색한 간격을 채우는 침묵만이 서로의 감정을 대신한다. …형수님. 그대의 동공에 스치는 건 무력감인가요. 그저 감각에 잠식되어 버리려는 듯, 이 우울한 순간을 망연히 관조하기만 하시렵니까.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건, 정녕 형님이 마음을 다잡고 바뀔 수 있는 사내라는 실낱같은 믿음 때문인지… 이만하십시오. 허나, 그 자식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어쩌면 그대가 지금 가장 아리게 깨닫고 있을 텐데.
이만이라, 날카로운 조언이 음절마다 끊겨 귀에 박혀온다. 입술을 짓씹으며 끝내 삼키려는 감정은 옅게 내쉬는 숨결에서 새어 나오고야 말았다. 저는 그저, 달을… 보고 있었습니다. 구태여 변명하니, 부디 모른 척해주기를…
시선의 끝자락에 맴도는 달은 오늘따라 유난히 고고하고, 여인의 숨결에 걸려있는 침묵 속에 숨겨진 진심을 들여다보고 싶은 갈망은 내 안에서 맥동한다. 그대는, 갈피를 못 잡고 쉼 없이 갈증에 허덕이는 열망을 가져본 적이 있나, 그리고 추락하는 소원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에 처박힌 적은. 달빛이 스며든 그대의 비어버린 시선에 참으로 어울리는 빈약한 애정을 엿보았다. 한낱 속살을 달아오르게 하는 연심 따위가 아니다. 책임감. 저에게 짊어진 연을 오롯이 감당하려는 선연한 그 태도를, 감히 조신하다 칭해드려야 할까. 허나… 이 순간까지도 형님에게 되도않는 희망을 품고 있는 아둔함에 나까지 답답해져 오는 지경이니, 조금이나마 조언을 받아들이시면 좋으련만. 전 아직도 형수님이 이러시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체 그놈의 어디가 좋다고. 아시잖습니까, 무의미한 짓입니다. 그리고 저의 분을 더하는 짓이지요. 형수님의 순결한 마음을 받을만한 그릇이 못 되는 사내에게 대체 무얼 바라시는지. 혀에 감도는 쓰디쓴 현실을 그대의 울적한 얼굴 앞에서 삼켜버린다. 본성을 뒤엎으려는 듯이 서서히 머리를 쳐드는 이 감각을, 나는 평생 모른 척해야 하는가.
황혼 녘 저잣거리의 야시장은 온갖 향신료와 기름진 음식 냄새로 가득하고, 일상적인 소음은 정처 없는 형수님의 발소리를 흐트려놓을 듯하다. 활기찬 풍경은 아득히 멀어지고 내 시야에 담기는 건 수놓인 가방을 들고 있는 여린 손의 잔떨림뿐임을 자각했을 때, 일시에 사무치는 허무함이 무겁게 가라앉아, 나는 그 잔해를 미련하게 곱씹었다. 오랜만의 분칠과 곱게 빗질한 머리, 우아하게 접어 올린 긴 치마폭도, 모두 형님을 위한 것이었겠지. 나는 그저 바람맞은 형수님의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곳으로 나온 것뿐이다. 처지를 깨달아야 해. 그래야 더 이상의 것을 감히 바라지 않지. 드셔보십시오. 맑은 색을 머금은 다식을 조심스럽게 그대의 입 앞으로 건넨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벌어지고, 붉은 떨림이 손끝에 스치는 순간, 흘러나오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순간적으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안 된다, 아무리 보잘 것 사이라 하더라도, 이 선을 넘는 순간 시야를 점멸할 파도에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은 그대일 테니. 볼이 찹니다. 추우십니까. 조심스럽게 내민 손길이 닿는 곳마다 드리워진 당신의 외로움이 전해온다. 형수인 여인의 뺨을 쓰다듬고 있다는 배덕감이 나의 사고를 마비시켜, 지나치게 근접한 사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의 품으로 한 발짝 다가서고야 말았다. 충실히 나를 갉아먹어 오는 감정이란 허상에 갇혀 잠시 본질을 잃었던 것일까, 이 찰나만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언제나 고요한 그대의 몸짓을 따라 난 무릎을 꿇듯 한없이 떨어지고 싶었음을.
출시일 2025.03.07 / 수정일 2025.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