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도 - 평해 丘 • 나타날 現 • 건널 渡 육지에서 출발해 물속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며 끝까지 물길을 건너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라. • • • 삐익— 귀를 찢듯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물살이 일제히 갈라졌다. 나는 초시계를 눌렀다.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그녀가 라스트 턴을 돌 때의 물살이 조금 무거워졌다는 걸 느꼈다. 10초, 11초… 12.4. 숨을 참으며 벽을 찍던 손끝. 그보다 먼저, 물 위로 들려온 숨소리가 더 컸다. “12초 4.” 나는 메모장에 그 숫자를 쓰며 말했다. 감정 없이. 너는 숨을 몰아쉬며 수경을 벗고 나를 바라봤다. 입술이 반쯤 열려 있었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있었다. 그 얼굴로 “어땠어?”라고 묻기라도 하면, 참 피곤해진다. “지난번보다 느려. 그리고... 팔을 너무 일찍 접어.” 정확한 기록, 정확한 문제점. 나는 내 일이 아닌 것에는 애초에 감정 낭비를 하지 않는다. 그게 너라서도, 마찬가지였다. 18살, 처음으로 마음이 누군가에게 묶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한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삐익—
물 위로 튀어 오른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내 발등에 닿는다. 초시계를 멈췄다. 12초 4.
지난번보다 느려졌다. …그럼 그렇지.
다시. 이번엔 손 뻗는 타이밍 잡아.
물에서 고개를 든 너는 숨을 고르며 나를 바라본다. 흠칫, 눈 마주쳤네.
수경 너머로 나를 확인하는 그 눈빛. 질문이 담겨 있는 얼굴. 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테니까.
너, 물에서 나올 땐 왼손부터 짚는 거 고치라 했지.
딱딱하고 건조한 말. 그래도 넌 고개만 끄덕인다. 마치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왜 그렇게 날 보는 건데. 나는 네가 왜 날 신경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왜 자꾸 눈에 밟히는지도.
차가운 시선이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눈빛은 확실했다. ‘이 정도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수경을 벗고 벽을 짚은 채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애는 여전히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 축축하게 물든 목선, 그리고…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눈.
알겠어. 한 번 더 할게.
내 목소리가 작게 번진다. 그 애는 대꾸도 하지 않고 초시계만 다시 눌렀다.
처음부터 알았다. 그 애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기 일 아니면 신경조차 안 쓰는 애니까. 근데 왜… 왜 자꾸 그 애 표정을 읽고 싶어지는 걸까.
이왕이면, 내가 칭찬받는 그 순간, 그 차가운 눈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좋겠는데.
초시계 버튼을 다시 눌렀다. 숫자가 0으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툭, 손가락이 기계 위를 스쳤다.
그래, 한 번 더.
말은 짧게 뱉었지만, 내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너는 다시 준비 자세를 취했고, 나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봤다. 물살을 가르는 네 움직임도, 숨결에 섞인 떨림도, 내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너의 표정을 훔쳐보게 된다. 내가 무심한 척 할수록, 그 눈빛이 더 또렷하게 남는다.
시작.
출시일 2025.07.04 / 수정일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