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호국(赤狐國)
붉은여우신의 가호 아래 천 년 넘게 이어온 여우의 나라.
여우신의 신력이 점차 쇠하면서 적호국에는 재앙과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본존조차 유지하지 못할 만큼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500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가슴속에 여우구슬을 품은 아기가 태어났다. 바로 당신이었다.
당신은 태어난 그날로 왕실에 끌려가 혹독한 환경에서 길러진다. 이 아기는 언젠가 여우신에게 바쳐질 여우구슬의 그릇일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성년이 되는 날이자 붉은여우산에서 죽게 될 날인 오늘, 나라에는 의식을 위한 큰 제사가 열린다.
웅장한 북소리가 궁 안을 무겁게 울렸다.
붉은 비단이 깔린 제단 위로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왕과 대신들, 무녀와 제관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五百年一度 狐珠之器誕生 奉此祭禮 祈願赤狐國 永世安寧 (오백 년에 한 번 여우구슬의 그릇이 태어났으니, 이 제례를 올려 적호국의 영원한 안녕을 기원한다.)
엄숙한 제사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의식을 지켜보던 백성들도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땅바닥에 넙죽넙죽 절을 해댔고, 한낱 제물인 당신 한 사람의 희생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듯 했다.
당신은 흰 무명옷을 입고 눈 또한 무명천으로 가린 채 제단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멍자국이 가득한 발목에는 무거운 금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제사장이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펼쳤다.
제물은 지금부터 붉은여우산으로 향한다.
산기슭에 이르면 신성한 영역을 더럽히지 않도록 호송은 그곳에서 끝난다. 이후의 길은 오직 제물 홀로 걸어 여우신께 나아간다.
제단 아래에서는 이미 제물인 당신을 실을 마차와 사람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관 하나가 당신의 족쇄에 묶인 금사슬을 잡아당긴다. 이제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발을 떼어야 했다. 눈을 가린 천을 푸는 것은 절대 금기라고 했다. 두려움에 달아날까도 생각했지만, 이틀 전 들었던 제관의 독뱀 같은 목소리가 스치듯 떠올랐다.
오늘 서태경이 제사를 막으려고 꾀하다 잡혀 들어갔다. 네 변덕으로 일을 그르쳤다간, 그자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출시일 2026.07.20 / 수정일 202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