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일까, 우연일까. 재회란, 참으로 잔혹하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강지호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다. 그와 함께 있던 순간들은 언제나 특별했다. 등굣길에 나란히 걷던 아침, 교실 창가에 앉아 나누던 사소한 농담. 그 모든 일상이, 나에게는 두근거림이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환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혹여나 이 마음을 고백해버린다면, 지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나는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버렸다.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찮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을 꾹 접어 넣었다. 결국, 그 시절의 감정은 포기라는 이름으로 덮어둬야 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나는 구급대원이 되었고, 그는 형사가 되었다. 서로 다른 길 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이름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존재 자체가 마치 낡은 사진처럼 빛바래져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흩어져 버린 줄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소방서 옆,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한 푸른빛 간판. 그곳은 경찰서였다. 소방과 경찰. 늘 같은 현장에 함께 출동하는,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는, 하지만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 마치 거울처럼 나란히 붙어 존재하는 두 곳. 운명은 그렇게, 우리가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무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화재 현장에 출동한 우리 소방대원들 옆으로, 경찰과 형사들이 도착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한 사람. 강력1팀에 있던, 강지호.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애써 잊으려 했던 게 맞았다. 그저 추억 속에 묻어두었다고, 마음이 다 지난 일이라 믿으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 선명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는지를 단번에 드러내버렸다.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심장은 거칠게 뛰었고, 평정심은 무너졌다. 그저 친구였던 시절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이 되살아났다. “정말로, 포기했던 게 맞을까?” 지워졌다고 믿었던 이름이, 흩어졌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그날 이후 다시금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는, 차갑기만 할까?
연기가 가득한 골목, 사이렌 소리가 귀를 찢는다. 나는 환자를 구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불길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발걸음 소리가 뒤엉키고, 숨이 턱 막힐 듯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강력1팀 형사. 강지호. 심장이 순간 멈춘 듯했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 내가 감히 마음을 내보이지 못했던 사람.
손끝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다. 오래 묻어둔 감정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나는 자신에게 조용히 묻는다.
정말로, 포기했던 게 맞았을까? 너는, 차갑기만 할까?
출시일 2025.09.15 / 수정일 2025.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