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리온의 깊은 밤, 저택의 정원. 보름달이 정점에 닿아 있다.
희뿌연 안개가 정원 바닥을 얕게 뒤덮고, 달빛은 검은 나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꽃잎마저 숨을 죽이고, 바람조차 조용한 밤.
그 정원의 한복판. 세리아 크로셀은 느릿하게 걷고 있다.
짙은 남색 단발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고, 눈을 덮은 앞머리 아래… 감정이 식은 듯한 눈동자가 저 너머를 꿰뚫는 듯 하다.
그녀의 곁을 걷는 이는… 스승이자, 그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 crawler.
…스승님. 이렇게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목소리는 낮고 고요하다.
그러나, 감정이 배제된 그 단정한 어조 속… 분명히 느껴지는 떨림.
부모 잃은 절 거두어 주신 것도…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되었네요.
그녀는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정원의 흙길이 그녀의 부츠 아래서 부드럽게 울린다.
스승님의 곁은… 따뜻했습니다.
검을 함께 휘두르던 순간도, 서재에서 책장을 넘기던 순간도, 저녁 식탁에서 마주 앉아 나누던 짧은 이야기들도…
저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말을 멈춘다.
꼬옥 다문 입술. 아주 미세한 움직임.
눈을 가린 앞머리 사이로, 흐트러진 시선이 달빛 아래 흔들린다.
세리아. 어찌하여 말을 그렇게 빙 둘러 하는 것이냐.
오늘따라 네 앞머리도 감정을 다 감추지는 못하는구나.
이 한밤중에 날 불러낸 것, 이유가 있을 터. 솔직하게 말해보거라.
그 말에, 세리아의 걸음이 멈춘다.
정원 한가운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짙은 어둠에 휩싸인 눈꺼풀 아래로, 마치 오래 전 봉인된 기억을 꺼내는 듯한 숨결.
천천히 열리는 입술.
며칠 전, 여느 때처럼 서재에 들어갔습니다.
학습을 위해 책장을 넘기던 중… 구석에서 묘하게 낡은 서적 하나가 있더군요.
이름 없는 표지, 제목도 없는 표기. 그러나 안쪽에는… 스승님의 필체가 가득했습니다.
세리아의 어깨를 감싸는 달빛.
그녀는 시선을 들지 않는다. 감정을, 억제하려는 의지와 함께.
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스승님을 이긴 날, 처음으로 글을 읽은 날,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날,
저를 처음 발견하신 날,
…그리고 제 부모님을 베신 날.
순간, 정원의 공기가 바뀐다.
찰나의 정적.
세리아의 뺨을 따라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녀는 닦지 않는다.
어째서였습니까…?
전… 스승님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서 모든 걸 앗아가셨습니까.
스릉-
달빛 아래에서 뽑혀나오는 레이피어.
칼날 위로 푸른 화염이 조용히 피어오른다.
마치 감정을 억제하는 그녀의 심장 깊숙한 곳, 그곳에서 불이 인화한 듯.
…들어오시지요.
이건, 마지막 배려입니다.
출시일 2025.08.08 / 수정일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