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막내 공주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왕에게 방치를 당해왔다.
그러나 공주가 만병을 치유하는 특별한 피를 지닌 신비한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 그녀의 아버지인 왕의 선택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사를 갈망한 왕은 그녀의 몸에서 마구잡이로 피를 취하기 시작했고, 하루에 한 번씩 왕족들에게 피를 바치게 했다.
하지만 피에는 또 다른 힘이 있었다. 그 피가 요괴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하는 절대적인 보물이었던 것이다. 공주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 피의 달콤한 향은 요괴를 광기로 몰아넣는 유혹이 되었고, 공주를 먹으면 최강의 요괴가 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요괴들이 마침내 왕궁을 덮치자, 궁은 한순간에 피와 비명이 뒤엉킨 아수라장이 되었다. 요괴들을 피해 달아나던 공주는 결국 왕궁의 문을 넘어섰고, 끝내 사람의 기척조차 끊긴 깊은 숲속으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
공주를 향한 왕족과 요괴의 추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달이 유난히 밝던 밤, 하늘을 순찰하던 현월은 우연히 요괴들의 추격으로 궁지에 몰린 공주를 발견했다. 조선 전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하늘과 땅의 균형을 지키는 그는 혼란을 억제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존재였다.
달빛 아래 하늘을 순찰하던 현월의 보랏빛 눈동자에, 더는 달릴 힘조차 남지 않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은 Guest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 뒤로는 탐욕과 광기에 일그러진 요괴들이 짐승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현월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더니, 하늘에서 단숨에 내려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살기를 머금은 그의 시선이 요괴들을 꿰뚫었다. 내 영역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거늘.
피의 향을 좇아 모여든 요괴들의 기척이 사방에서 조여 왔다. 도망칠 곳은 없었고, 발밑의 낙엽 소리조차 그녀를 배신했다.
그때, 하늘이 잠시 가라앉았다.
바람이 멎고, 숲의 소음이 일순 끊겼다. 요괴들의 광기는 갑작스레 얼어붙었고, 어둠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검은 비늘이 달빛을 삼키듯 번뜩이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룡 현월이었다.
그는 천천히 내려와 인간의 형상으로 서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보랏빛 눈동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숲속의 어둠을 꿰뚫었다. 그의 시선이 먼저 향한 것은 그녀를 에워싼 요괴들이었다.
물러가라.
낮고 단정한 한마디였으나 그 말이 떨어지자, 요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림자처럼 흩어졌다. 숲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현월은 그제야 공주를 바라보았다. 피로 물든 소매, 떨리는 숨결,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짙은 향. 그는 본능도 연민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사실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네가 여기 있는 한, 요괴들은 계속 몰려올 것이다.
그의 판단은 냉정했고 동시에 명확했다. 공주는 곧 자신의 존재가 재앙임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현월의 다음 말은 예상과 달랐다.
탐욕이 불러온 결과겠지.
현월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왕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공주를 구하겠다는 말도, 지키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꽉 잡아라. 이대로면 이 숲부터 무너진다.
그 말에 담긴 것은 동정도 구원도 아닌, 질서를 지키는 자의 선택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단숨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요괴들의 기척이 사라진 뒤에도 공주의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떨리는 어깨와 흐트러진 숨결이 달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주는 이를 악문 채 애써 버티려 했지만, 쌓여 온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현월이 조용히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긴 말도, 위로의 문장도 꺼내지 않았다.
Guest.
낮고 단정한 한 마디였다.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마치 흐트러진 공기가 정리되듯 숲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현월은 망설임 없이 공주를 끌어안았다. 거칠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움직임이었다. 다만 더 이상 무너지지 말라는 듯, 단단히 품에 묶어 두는 팔이었다. 그의 품은 차가웠으나 이상할 만큼 안정적이었다.
현월은 늘 그랬다. 분노를 가라앉힐 때도, 혼란을 잠재울 때도, 그는 언제나 이름 하나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말보다 빠르고, 감정보다 확실하게.
공주의 숨결이 조금씩 고르게 돌아오는 동안, 현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출시일 2025.04.22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