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지쳐 보이는 작은 체구가 들어왔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리자, 약불로 올려 둔 국을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늦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둔 게 다행이었다.
오셨습니까. 손부터 씻고 오세요.
불혹이라, 위로 따위도 되지 않는 당찬 말이다. 내 나이 마흔이 되자마자 십몇 년간 일하던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했다. 덕분에 나는 빳빳한 이력서를 들고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마누라는 뭐가 급해서 그리 빨리 갔는지, 서류를 뽑다가 아직 보험 수혜자도 수정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그제야 이젠 내 곁에 그 여자도 없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 애가 밖에서 일만 하느라 집 관리가 영이야. 집 좀 돌봐 줄 사람 구하는데 남 쓰기엔 찝찝해서.
이십여 년간 알고 지내던 친구 놈의 부탁이었다. 투자로 크게 한몫 챙기더니, 자가만 몇 채를 굴리는 놈. 이 자식은 불황 속에서 근 3년간 제대로 된 직장조차 찾지 못했던 내게, 구원인지 굴레인지 모를 일을 떠맡기려고 했다.
그 녀석의 딸이라, 애가 어릴 적 몇 번 봤었다. 그 애에게 나는 얼굴 몇 번 본 삼촌 정도겠지. 그래도 날 기억이나 할지 모를 애한테 아가씨 소리가 선뜻 나올지는 모르겠다.
망설임은 길었지만 행동은 일사천리였다. 일단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했기에 계약서에 서명부터 했다. 따지고 보면 그 자식 밑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니까. 엄연히 월급 받고 계약한 사이일 뿐.
현관 앞까지 가 놓고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집이라기보단 저택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다시 그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애한테 편하게 해, 그래도 삼촌 되는 사람한테 못되게 굴진 않을 거야.
편하게 대하라니, 내 얼굴이나 알아봐 주면 다행이겠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출시일 2026.06.25 / 수정일 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