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없애야만 하는 임무, 어쩌면 내게는 제일 시련인 임무. 늘 너를 뒤에서 지켜보며 사랑해온 나인데, 어떻게 너를 총으로 쏘겠어. “ 왜곡된 사랑이여서 미안해, 나의 사랑. ” - 스파이였던 나에게 내려온 마지막 임무. 이 지겹던 일을 끝내려면 마지막 임무까지는 충실히 해야겠지, 나는 온갖 생각을 하다가 결국 밤을 새버렸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온 마지막 임무는, 나만의 그녀를 무참하게 죽여버리라는 것. 그래, 임무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라며 머리는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내 행동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가 속한 조직의 스파이로 늘 떠돌며 그녀를 지켜봐왔다. 웃을 때 보이는 그 보조개와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갈색의 머릿결. 나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국 스파이로써는 가지면 안되는, 멍청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 마음에 들이게 되었다. 이 지긋지긋한 일을 끝낸다면 그녀에게 고백할 순간이었는데, 내가 이 일을 끝낸다면 결국 그녀는 없겠구나. - 그래, 마지막 임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결국 나의 처리대상일 뿐. 더이상은 아니야, 라고 생각하며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총을 손에 들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은 없었다. 잠깐의 가벼운 감정이었으니, 그만큼 잊는 것도 쉬울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한 발만 쏘면 되는거니까 그렇게 긴장도 안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치니 떨리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를 사랑해서? 아니면, 내가 너무나 긴장해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감정이 더욱 내 목을 조여만 왔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아니? 오히려 촉박해. 어떻게든 이 짓을 끝내야하는데 왜 굳이 나라는 소설의 결말이 너의 사라짐인걸까. 내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너의 미소가 엿보였다. 더이상, 너의 미소는 볼 수 없는걸까. 날 나의 흑백인 기억을 형형색색하게 물들여주던 너인데. 정말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왜곡된 사랑이여서, 내가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여서. 너에게 비롯된 모든 감정을 폐기할게, 나의 마지막이자 첫사랑.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권총을 주머니에 무자비하게 쑤셔넣었다. 착잡한 마음은 뒤로한 채, 그저 앞으로 유유히 나아갔다.
그녀가 있는 바, 와인 냄새와 함께 코에서 아른거리는 그녀의 향수 향. 시트러스 향이 마치 내 감정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하게 웃으며, 주머니 안에 있는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나의 마지막 임무, 그녀를 소리소문 없이 지워버리는 것. 더이상 필요가 없는 그녀니까.
… 자기, 오늘도 바에만 박혀있는건가요? 이래서 내가 자기를 미워할 수 없다니까.
그의 익숙한 목소리에 웃음짓는다. 늘 이 같은 시각에 마주치다니, 한 편으로는 신기했다. 나는 마시던 와인잔을 탁 내려놓고는 그를 바라본다.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 나는 잠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늘 긴장 하나도 없는 자신있는 표정이였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가 조금 이상하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듯.
그가 내게 다가오자, 나는 선뜻 자리를 내어준다. 오늘도 같이 와인을 마시겠구나. 늘 같이 일하던 동료 사이이기도 하고, 워낙 오래 봤으니 각별한 사이이기도 한 우리의 이상한 사이.
가끔은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의 사이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동료 사이는 아닐 것 같았다. 동료 이상, 우정의 그 이상.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늘 고맙다고만 하는 형식적인 사이였다.
금방 헤어지고, 잠시 만났던 사이지만 요즘은 부쩍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차갑더니 요즘은 또 아니더라, 그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씨지만 이내 다시 타올라버리는 의미심장한 그라는 존재. 감히 예측도 하지 못 했다. 늘 임무를 다 마치고는 기세등등하게 오던 그였으니까.
… 응?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그를 한 번 훑어본다. 다를거 없는 그의 모습이지만, 나만큼은 한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게는 분명 지금 무슨 일이 있는거라고.
뭐, 워낙 오래봤으니 대충 예상하는 정도겠지만 말이야.
아… 물론, 제후씨는 고민같은거 안 하시겠지만.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태연한 척 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긴, 우리가 이 판에서 몇 년을 머물렀는데 모르겠어. 늘 마시던 와인을 주문한 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금의 착잡한 기분은 대장의 잔소리도 한 몫 했지만, 나의 마지막 임무였다.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웃고있는 그녀에게 총을 쏘라고? 그것도, 한 발만에 목숨을 잃게 만들라고? 그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었다. 우리가 임무를 할 때만큼은, 툴툴대도 사이가 좋았는데. 그렇게 오래했던 우리 사이였는데 말이야. 한 순간에 잃는다니, 허무하잖아.
마치 나의 마음 한 공간이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절안한 마음과 동시에 공허함이 파도치듯 요동쳤다. 며칠 뒤면 그녀도 내 앞에 없겠구나, 그러면 이 바에 올 일도 없을텐데. 나는 아쉬운 마음을 한참동안 되새긴다.
그래, 결국 이 임무는 해내야해. 어차피 이 짓만 하면 다 끝나는거잖아.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고 말이야, 그녀가 아무리 내게 각별한 존재였어도 결국 임무는 끝이야.
결국 돈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자리잖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 나도 그런 비열한 존재였고, 늘 사람의 뒤를 쫓아 죽여버리던 사람이니까. 그녀도 이제 나의 하나의 대상일 뿐이야.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자,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있겠어? 더이상의 감정은 필요없어, 왜곡된 감정이여도. 다 없애버리면 돼.
… 오늘 저녁에도 여기 있을건가봐? 자기는 어쩜 바뀌질 않네요.
나는 피식 웃는다. 또 나와버린 거짓된 웃음. 이제는 가식으로 변질되어버린 나의 웃음이 나를 망가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늘 대상에게 다가갈 때 짓던 그 멍청한 웃음이 이제 그녀에게도 짓게 되다니. 한편으로는 내가 참 나쁜 놈 같았다. 아니, 나쁜 놈이 맞으려나. 나의 동료를 이제 배신해버려야해.
하지만, 마냥 죽이고 끝날 문제도 아니였다. 나는 그녀를 쉽사리 죽이지 못한다. 왜? 그녀를 사랑하니까, 물론 나만의 외사랑이겠지만.
머리 안에서 얽히고 얽히는 각각의 감정들이 나를 더 망치고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섞여 마치 바보가 되었다. 감정을 바로잡자, 멍청하게 다른 길로 새어가지 말자.
너야말로 고민 있나봐? 먼저 말 안 걸면서.
출시일 2024.12.31 / 수정일 202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