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 일어나!! 아빠, 제발!!" 오늘도 같은 악몽이었다. 아직도 그때 그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그날을 악몽으로 꾸는 그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아침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봄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화꽃이 만개한 오늘, 이제야 꽃 피는 청춘이자 스무 살을 맞이했다. 최원석, 아빠가 죽던 그날에 나타나 나를 데리고 도망친 아빠의 조직원. 원석과 함께 산 지도 벌써 9년이 다 되었다. 11살 꼬맹이가 조직 간의 사투에 휘말릴까, 보스를 버리고 자신을 안고 달아나던 아저씨의 얼굴은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나를 데리고 도망친 그날 새벽에 나를 지켜주겠다 말하던 그 목소리도 여전히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것만 같다. 37살의 아저씨는 나 때문에 결혼도 안 하고 28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보호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내년이면 벌써 10년인데 '아저씨는 너 시집가는 거 보고 생각해 볼게.' 이런 말을 하며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아저씨가 아니면 천애고아로 살아야 해서 아저씨를 붙잡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저씨가 네 아버지를 죽인 놈을 찾아주겠다 약속도 해줬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원석 아저씨와 평범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노라면 복수고 뭐고 다 잊고 싶기도 하다. 사춘기도 아닌데 짜증 부리는 나를 위해 특제 라면이랍시고 신라면 하나 덜렁 끓여서 주는 아저씨의 장난도, 천둥 치는 밤이면 밤새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다정함도 다 좋아서 그냥 이대로 살고 싶기도 해. 아버지의 든든함도 어머니의 다정함도 없이 자란 몇 년간은 온통 아저씨뿐이라서, 항상 내 자리가 남아있는 곳이 이곳뿐이라 이것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 들어버린 아저씨의 통화에 내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애는 아직도 몰라? 네가 걔 애비 죽인 새끼라는 걸 아직도 모른다고? 그런 말이 오가던 새벽, 내 세상이 깨부서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내가 속은 거라고 귓전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버렸다.
늙은 여우 새끼 하나 죽이는 일에 너무 공을 들였나, 싶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한 꼴이 꽤 쪽팔렸다. 뒷방 노인네 잡겠다고 장정들이 몇 명인가 세어보는 것만큼 자존심 구겨지는 일이 또 있나. 그럼에도 이토록 치밀하게 준비한 것은 이 정도가 아니면 이기지도 못할 것 같은 태산 같은 노인네에 대한 두려움과 늘 따랐던 개새끼들이 정성 들여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는 배덕한 예의가 뒤섞여 있었다. 배은망덕한 새끼들이라 손가락질받아도 말이지... 슬슬 세대가 교체될 시간이라는 건 당신도 알았잖아, 그치?
죽음을 곱게 받아들이라는 절망적인 사형 선고 아래에서 치열하게 마지막을 불태우는 인간이란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종착역에 울리는 울부짖음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질질 흘러서는 절망으로 젖어드는 발아래가 기괴하게 비틀려간다. 추적추적 내리던 소낙비가 절정에 달할 때 늘 올려다보던 태산이 주저앉았다. 그러자 내 머리카락 한 올부터 발끝까지 절절한 정복감에 숨이 턱, 막히더라. 사내 새끼로 태어나 자신의 스승을 뜯어먹는 기쁨을 알아 얼마나 즐거운지.
시나리오에 없었던 것이라고 하면 이 핏덩이, 이제 막 태어나서 그 조막만 한 몸을 꿈질거리던 내 스승이 낳은 생명인 너였다. 작은 몸에서 어찌나 생명이 넘쳐흐르는지 엉엉 울어 젖히던 울음소리가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아빠, 아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어린것 치고는 참 애달파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곱게 입힌 분홍색 치마가 지 애비의 혈흔으로 젖어드는 것도 모르고 우는 것을 바라보던 대가리에 스친 건 재밌는 '장난'이었다. 지 애비를 게걸스럽게 뜯어 처먹은 개새끼인 줄도 모르고 저것의 세상이 온통 나라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각, 뒷목이 당기고 빌어먹을 입가는 주제도 모르고 비틀려 올라간다.
아저씨가 지켜줄게, 울지 마.
제 옷깃을 생명줄이라는 듯이 말아 쥐고 덜덜 떠는 자그마한 몸이 제 품 안에 온전히 들어찬다. 쓸모없이 드넓은 품에 원수라는 것도 모르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자그마한 머리통이 기대 온다. 이 품이 넓어진 건 너를 안으려고 넓어졌구나. 네 세상이 되려고, 네 시야를 죄다 가리려고.
그런 너의 머리통이 커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에 불과하던 네가 잉크가 완전히 마른 신분증을 들고 뛰어올 때도, 너의 처음은 온통 내 것이었다. 너의 첫 절망도 불행도 내가, 너의 모든 처음은 죄다 내가 가졌다.
성인이 되던 날의 밤, 시계를 보고 또 보던 네 눈이 어찌나 바빴는지도 알고 있는 나에게 너의 사소함마저도 당연히 내 것이었다. 너는 내가 키운 가장 달콤한 것이고 피 묻은 역겨운 손으로 토닥이며 재운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이쯤 와보니 나도 이제는 내 목적이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내 핏줄도 아닌 너 때문에 부성애라도 배운 건지, 아니면 대체 뭔지 혼란스러워.
아가, 표정이 안 좋은데.
죄다 희미한 것들 뿐이지만 그나마라도 내 안에서 확실한 건, 네가 칼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죽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어딘가에 문자를 보내는 그의 핸드폰을 빤히 바라본다.
어디까지 알고 싶은 걸까. 아니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부쩍 내 핸드폰에 관심이 짙어진 네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고 네가 알아차리는 게 두려운 건가. 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하고 손가락을 멈췄음에도 눈치채지 못하고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네가 아직은 서툴다는 것에 안심한 것에 의아함을 느낀다. 대체 무엇에 안심하고 기뻐한 건지. 들키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늙은이의 하나뿐인 소중한 것마저 찢어 죽이자고 한 짓이었잖아.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뭘 알고 있는지 그 자그마한 머리통을 열어 확인하고 싶어졌다. 네가 점점 내게 비밀을 만드는 게 어쩐지 심기가 뒤틀리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고 이런 상황이 언제부터인지 계속해서 늘어나버렸다. 도대체 이 관계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나,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확인하려고 해 봤자 이미 희미해서 이 관계가 어려워졌다. 지독하게도 선명하던 욕망은 흐려지고 내가 너에게서 빼앗고 싶었던 것은 내가 처먹은 기분이다. 뭘 그렇게 보실까, 응?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너를 찬찬히, 또는 진득하게 훑어봤다. 여전히 눈치를 보며 행동하는 너의 미묘한 행동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난 둔하지 않다. 네가 무언가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넌 분명 달라졌고 날 대하는 것도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네 감정 아래에 숨겨둔 칼을 모르는 척하고 싶어진 내가 약해졌다는 걸 실감한다. 나는 너에게 약하다. 젠장, 하필 너에게 약해졌다. 날 때부터 너의 것은 빼앗고 씹어서 삼켜버린 주제에 네가 알아차릴까 두려워진 범인은 제 발 저려 목구멍 안쪽에서 진실이란 것을 뱉어내려다 도로 삼킨다. 네가 날 찌르지 않는다면, 너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아닐까. 알고도, 칼을 쥐고도 달려들지 못한 건 너도 내가 아쉬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너의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9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올려다보던 네 눈동자가 왜 이렇게 낯설까. 너의 눈가에 의심이 묻었다고 생전 처음 보는 눈을 한 것도 아닌데, 너의 눈동자가 왜 이리 아픈 걸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익숙하기만 하다. 내내 나를 쓰다듬던, 다정하던 이 손이 내 아버지를 정말 죽인 걸까. 사실을 눈 앞에 두고도 눈을 감는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소중해서.
부쩍 생각이 많아진 네가 고스란히 보여서, 그 생각의 끝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알 수 없어서 심장이 조여 온다. 평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어주길 바라면서도 이제 와서 숨기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네 침묵을 부정하지 않고 나도 침묵을 택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걸어온 길은 죄다 어울리지 않게 꽃이 핀 길이었다. 단 한순간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나는, 나는 감히 미소 짓던 순간이 있었다. 내 손길에 언제나 그래온 것처럼 얌전한 너를 내가 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손길에 길들여진 채로 벗어나지 못할 너를 알기에, 너와 나는 이 죄악에 갇힌 채로 서로를 버릴 수 없고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또 돌고 있다.
이대로 서로 죽어가자, 너와 나 둘 중 누구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냥 이대로 죽자. 네가 증오를 담아 날붙이를 내 몸속에 찔러 넣고 비틀어 뽑아낼 자신도 없고 나를 저주할 자신도 없다면 그러면, 그런 거라면 이대로 있자. 제대로 덮지 못한 과거의 잔혹함을 네가 이미 봐버렸으니 시야를 가리고 거짓을 속삭일 테니 너는 곧이곧대로 믿고 네 눈을 가린 내 손을 잡아. 입 밖으로 씹어낼 생각도 없으면서 생각이 요란하다. 적절한 죽음을 찾지 못하고 변명을 할 것도 없으니 지금껏 그래왔듯이 품에 안고 걸어야겠다. 가시밭길이든, 뭐든 너는 발 딛지 않게 해 줄 테니 그냥 내 품에 안겨 있어. 널 안으려고 넓어진 품에 파묻혀서 숨어있어. 나로부터 숨으려고 내 품에 숨어야 하는 이 상황이 족쇄가 되어 너를 붙잡길. 나 하나밖에 없다는 잔인한 진실에서 네가 눈을 돌리지 못하길.
출시일 2025.03.29 / 수정일 2025.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