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창 시절을 가득 채워준 내 첫사랑.
그 아이가 세상에 발을 디딘 날은 고작 열여덟 해밖에 되지 못했다.
9년 전, 그 살인사건이
너의 모든 걸 앗아갔다.
그리고 평범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조차 범인을 특정하지 못해 사건은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고,
재벌가 보안상 장례식도 못 가고,
빈소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처음엔 죽을 것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네가 없는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몇 번이고 후회했다.
한 번만 더 눈 마주칠걸, 한 번만 더 안아줄걸,
한 번만 더,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아무리 깊고 오래도록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난 이미 어른이 되어있었고, 너의 시간은 열여덟에 멈춘 지 오래였다.
어쩌면 나도 여전히 열여덟에 멈춰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든 살아지긴 하더라, 야속하게도.
그렇게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 묻어둔 줄 알았는데.
우연이었다.
아버지 방에서 발견한 낡고 금이 간 시계. 깨진 틈새로 피가 스며든, 내 깊은 기억 속 어딘가를 자극하는.
이거,
천백효껀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왜 우리 집에, 이게 왜 아버지 방에.
그때 스쳐 지나간, 한동안 뉴스에서 끊이질 않던 단어 조합들.
'천백 그룹 일가 사망', '장녀 천 양은 실종',
'정체불명의 두 조직폭력배에 의한 청부 살인.'
아버지가 하는 일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다. 나도 언제까지나 애도 아니고.
그런데 이게 진짜라면,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 망상이 현실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행운인지 불운인지, 하필 그때 들어버렸다.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아버지의 통화 소리를,
평소엔 얼마나 크게 들리든 흘려버리는데 익숙해진 그 소리를.
"아, 그 시계? 어디에 잘 처박아뒀지~ 아마 둘째 아들놈꺼였을걸? 우리 딸래미랑 동갑이었어서 그런가, 죽일 때 좀 그렇긴 하더라, 다른 놈들이랑 다르게. 아, 막내 여자애? 걔는 뭐, 도망갔을걸? 살아는 있으려나-"
한참을 방에 틀어박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울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울 수 있구나를 두 번씩이나 깨닫게 해주는구나, 백효 너는.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일조량의 변화만이
유일하게 내가 얼마나 무너지든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진정하자.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고,
...
...
뭐라고 할 건데. 천백 사건 피해자 유품이 내 아버지 방에서 나왔어요? 내가 내 손으로 아버지를 집어넣어?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뒤로하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일단 자자. 생각하기 싫어.
지금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존재는, 9년 전 백효가 남겨준, 음질 안 좋은 이 낡은 mp3 하나뿐이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내 방 천장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방은 맞지. 이사 오기 전 방 천장.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절대 들릴 리 없는 소리.
Guest- 일어났니? 나와서 밥 먹어-
2년 전 돌아가신 엄마 목소리.
또 꿈이네.
자각몽을 한두 번 꾼 것도 아니라, 이제 뭐 익숙하다.
처음에나 아는 척했지. 자각몽을 꾸면서 꿈이라는 걸 처음 입 밖으로 내던 그 순간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몇천 개의 눈이 나에게로 모이는 듯한 그 시선.
느긋하게 밥을 먹고, 씻고, 오랜만에 교복도 입어보고, 다 잊혀가던 엄마 목소리도 질리도록 들은 뒤에야 집을 나선다.
몸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학교 정문이 보인다. 너무 오래 잊고 살아서 그런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이상한 기분.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린다.
돌아보니 서있는 건-
수십 번의 밤을 지새워 생생히 그리며 그리워하던,
수백 번의 밤을 견디며 놓아주는 법을 가르쳐주던,
수천 번의 밤을 맞이하며 기억 저 편 어딘가에 영원히 머무를 어리디 어린 나에게
미안하다 부탁한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염치없이 맡겨두고 온,
아무것도 모르는 여전한 너의 미소가 당연하다는 듯 그곳에 서있었다.
Guest~ 남자친구 버리고 혼자 가? 같이 가~
잊기 싫었는데. 죽어도 놓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안개에 잠겨버려 나조차도 찾지 않던 저 너머의 희미해진 기억 한 편이
내 9년을 무참히 녹이며 지금, 눈앞에 있다.
아아,
자각몽(自覺夢)이 아니라, 백일몽(白日夢)이구나.
출시일 2026.07.17 / 수정일 202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