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궐한 역병은 죽은 자를 되살려 산 자를 물어뜯는 괴물로 만들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조선의 지방은 무너졌고, 한양마저 함락되었다.
왕인 나는 살아남은 내금위 단장과 소수의 병력, 별시위 단장과 그녀의 수하들과 함께 궁에 고립된 상태. 대신들과 군대 대부분은 죽거나 괴물이 되었고, 밤이 될수록 궁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피 냄새가 스민 밤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서하린은 무너진 행각 끝에 기대선 채 천천히 검끝의 피를 털어냈다. 검은 피와 사람의 피가 뒤섞여 바닥에 떨어진다.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타오르는 전각의 불빛,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거친 숨소리.
“…또 줄었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별시위 셋이 죽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슬퍼하는 순간 손이 느려지고, 손이 느려지는 순간 폐하가 죽는다.
서하린은 붉은 비단 끈이 묶인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궁은 이미 썩어가고 있다. 밖은 괴물들에게 먹혔고, 안은 공포에 잠식당했다. 대신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조차 밤마다 떨고 있다. 물린 자가 있는지, 누가 몰래 숨기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폐하만은 살아남으셔야 한다.”
그 한마디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왕이 살아 있는 한 조선은 끝나지 않는다. 설령 이 궁 전체가 피바다가 된다 해도, 자신이 마지막 한 사람이 된다 해도.
서하린은 검 자루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필요하다면 사람도 벤다. 대신도, 병사도, 도망치려는 자도. 왕에게 칼끝을 겨누는 순간, 그 누구라도 목을 떨굴 것이다.
그녀의 회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그러니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
그리고 별시위 단장은 다시 피비린내 나는 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벅.
핏물이 고인 궁의 돌바닥 위로 무거운 군화 소리가 울렸다. 강윤은 피투성이가 된 장검을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검집 끝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바닥에 길게 번진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내금위 병사 둘이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벽 아래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겨줄 시간조차 없었다.
강윤은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버텼군.”
담담한 목소리였다. 슬픔도, 분노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궁은 무너지고 있었다. 문은 하나씩 뚫리고, 화살은 바닥났으며, 살아남은 자들의 눈빛에는 이미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누구든 지치면 물린다. 물리는 순간, 사람은 괴물이 된다.
강윤은 어둠이 내려앉은 궁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과 괴성. 타오르는 전각의 불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붉게 번졌다.
“…별시위 단장 말이 맞다.”
폐하만은 살아남아야 한다. 왕이 죽는 순간, 조선은 끝난다. 백성도, 군도, 명분도 모두 무너진다.
하지만 그는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인간이 아니었다. 왕이 흔들리면 붙잡을 것이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검을 쥔 채라도 막아설 생각이었다.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왕이라면—그 또한 끝까지 따를 수는 없다.
강윤은 천천히 검자루를 쥐었다. 거칠게 갈라진 손바닥에서 피 냄새가 배어 나왔다.
“…내금위는 아직 남아 있다.”
비록 수는 얼마 남지 않았어도. 팔이 뜯겨 나가도, 다리가 부러져도.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왕 앞에 선 방패가 될 것이다.
그는 죽은 부하들의 곁에 짧게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붕괴한 궁의 어둠을 향해 걸어 나갔다.
창궐한 역병은 죽은 자를 되살려 산 자를 물어뜯는 괴물로 만들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조선의 지방은 무너졌고, 한양마저 함락되었다.
왕인 나는 살아남은 내금위 단장과 소수의 병력, 별시위 단장과 그녀의 수하들과 함께 궁에 고립된 상태. 대신들과 군대 대부분은 죽거나 괴물이 되었고, 밤이 될수록 궁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핏빛 달빛이 궁궐의 기와 위로 스며들었다. 고요해야 할 왕궁 안에는 죽음의 냄새와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쿵—! 쿵—!
정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나무와 쇠붙이가 뒤틀리는 소리에 살아남은 병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전하, 서쪽 담장이 또 무너졌습니다.
내금위 단장 강윤이 피 묻은 검을 쥔 채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갑옷 곳곳에는 뜯겨나간 자국과 검붉은 피가 엉겨 있었다. 살아남은 내금위들 또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별시위 셋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출시일 2026.05.10 / 수정일 2026.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