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6년 겨울. 창밖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칼처럼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한 남자가 병원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호스피스 병동으로 올라갔다. 띵. 병실 문을 열자 창가에 누워 있던 중년의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 "...왔어요?" 여전히 따뜻한 목소리였다. "밖에 춥죠?" 남자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참을 만해." 그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붕어빵. "여보가 좋아하는 붕어빵 사 왔어." "...먹고 싶다 했잖아." 희정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한입 베어 문 붕어빵에서는 달콤한 팥 향이 퍼졌다. 희정은 남은 하나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같이 먹어요." "...혼자 먹으면 맛없잖아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받아 한입 베어 물었다. 병실 안은 따뜻했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붕어빵만 먹었다. 그날. 그 붕어빵은. 희정이 생애 마지막으로 먹은 붕어빵이었다. 장례식이 끝났다. 집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사람들이 떠난 뒤 남자는 희정의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 사진. 머리끈. 향수. 그리고 서랍 가장 안쪽에서 낡은 수첩 하나가 나왔다. 모서리는 헤졌고, 표지는 색이 바래 있었다. 수없이 펼쳐 본 흔적. 남자는 천천히 첫 장을 펼쳤다. ‐-------------------------------------------- 2026년 1월 4일 오늘 김부장님께 된통 깨졌다. 집에 가는 길. 처음 보는 밥집이 보여 들어갔다. 사장님이 엄청 환하게 반겨주셨다. 음식이 나왔는데... 와. 엄마가 해주던 맛이었다. 여기 이제 내 단골이다. ‐--------------------------------------------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때였구나." 희정은 종종 회사 이야기를 했다. "김부장이 나이도 많으면서 자꾸 플러팅해." "거절했더니 맨날 괴롭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웃어넘기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남자는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손이 멈췄다. ‐-------------------------------------------- 2026년 4월 3일 행복밥상 사장님이 날 보자마자 껴안으며 울었다. 뭐지? 너무 당황했다. 그런데... 우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아팠다.. ‐-------------------------------------------- "...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이 없었다. 아무리 떠올려도. 2026년 4월. 그녀한테 그런적이 없었다. 미쳤다고 단골을 껴안을까.. 그런데. 왜 저런 일이 적혀 있는 거지? 남자는 수첩을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내용은 평범했다. 그러다 마지막 장에서 손이 다시 멈췄다. 낡은 기차표 한 장.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지만 글자는 선명했다. 2046년 12월 24일 새벽 2시. 오솔역 출발. 그리고 그 밑에. 짧은 글귀. 날 찾으러 와요.

"...뭐야." 남자는 기차표를 뒤집어 봤다. 오솔역. 20년도 전에 폐쇄된 간이역.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곳. 그런 곳에서 기차가 다닌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차는 새벽 고속도로를 달렸다. 두 시간. 라디오도 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착한 오솔역은 폐허였다. 녹슨 철문. 깨진 유리. 마른 갈대가 바람에 흔들렸다

남자는 손전등을 켜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확인했다. 1시 58분. "...미친 짓이네."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띵— 낡은 역에서는 들릴 리 없는 안내음이 울렸다. 그리고. 멀리서. 칙— 칙— 기차 바퀴가 레일을 긁는 소리. "...설마." 안개를 가르며 새하얀 기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천천히 플랫폼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내려왔다. "승차권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얼떨결에 기차표를 건넸다. 역무원은 잠시 표를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주의 사항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있었던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말하시면..무슨일 벌어질지 모릅니다" 기차표를 돌려주며 안으로 안내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탔다. 내부는 오래된 지하철처럼 생겨 있었다. 객실은 단 한 칸.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문이 닫힙니다. 안내 방송이 울리고. 기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창밖은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언제부턴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남자는 저항할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객실 앞 전광판. 2046년 12월 24일 숫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46년 12월 24일 2041년 05월 12일 2036년 03월 17일 2030년 09월 21일 그리고. 2026년 4월 3일. "...사장님." 누군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사장님?" 익숙한 목소리. "일어나 보세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스물다섯 살 무렵의 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 생머리. 수수한 회사원 차림.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한 미소. "...희정아." 박희정. 젊은 시절의 아내였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희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그 순간.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다시는..." 목이 메었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희정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굳어 버렸다. "사... 사장님?"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하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사람. 마지막 붕어빵을 함께 먹었던 사람. 차가운 병실에서 끝내 손을 놓아야 했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자신의 품 안에서 따뜻한 체온을 전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출시일 2026.07.19 / 수정일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