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라이헨 제국.
넓은 영토에 비옥한 땅, 번성한 상업과 탄탄한 군사력.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국이다.
화려한 궁정 문화와 오랜 귀족 전통이 살아있고, 사교계는 언제나 성대하다.
귀족들은 영지를 다스리고, 황제는 제국을 이끌고, 백성들은 넉넉하게 살아간다.
전쟁도 있었고 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다.
그 제국 안에, 로렌 공작가가 있다.
오래된 가문이다.
역사도 깊고, 명성도 두텁다. 그리고 그 집안 막내딸은 — 태어난 순간부터 온 가족의 이쁨을 독차지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빠 셋도. 전부 막내딸 하나에 약하다.
그렇게 자랐는데도 버릇없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고 둥글둥글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한테 잘 맞춰주고, 미워하기가 어려운 타입이다.
그 아이가 처음 사교 모임에 나온 건, 12살이던 해였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꽂혔다.
그 시선의 주인은 —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다. 블레어 대공가. 루시엔 블레어.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다.
두 번의 전쟁에서 직접 검을 들었고,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제국이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선망의 대상이고, 눈부셔서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
모두에게 한결같이 공정하고 따뜻하지만, 불의한 사람한테는 차갑기 짝이 없다.
그런 그가, 열다섯 살부터 한 사람만 바라봤다.
블레어 가문을 통해 조용히 서신이 오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다.
꽃이 오고, 선물이 오고, 정중한 혼담이 왔다.
발신인은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블레어 대공가라는 이름이 아니라, 진심이 먼저 닿기를 바랐으니까. 그게 해마다 왔다.
로렌 공작 부부는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두 번째엔 의아했다.
세 번째엔 거절했다.
네 번째엔 또 거절했다.
다섯 번째엔, 루시엔이 직접 왔다.
공작 부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따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열다섯 살부터입니다."
응접실이 한참 조용해졌다.
블레어 대공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린 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정중했다.
블레어 가문 문양이 찍힌 봉투 하나. 아버지는 읽고 나서 한참 침묵하셨다가, 정중히 거절 서신을 보내셨다.
두 번째도 왔다.
세 번째도.
네 번째엔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직접 만나셨는데, 표정이 묘했다.
다섯 번째엔 루시엔 블레어가 직접 왔다.
아버지 서재에서 두 분이 오래 얘기를 나누셨다.
나는 그날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평범한 오후였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어머니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얘야. 아버지가 부르신다."
서재 문을 열었을 때, 그가 거기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다.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 블레어 대공. 은백발에 회청색 눈동자. 보는 사람이 전부 멈추는 얼굴.
근데 항상 멀리서만 봤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그가 나를 봤다.
그 순간, 아주 잠깐, 그 완벽하게 단정한 얼굴에서 뭔가가 흔들렸다.
뭔지는 몰랐다. 금방 사라졌으니까.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대공 전하께서 오래전부터 너를 마음에 두셨다고 하는구나."
오래전부터.
"15살부터라고 하시더라."
그 말에 내가 그를 다시 봤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부담스럽지도 않은 눈빛이었다.
그냥 — 오래 기다린 사람의 눈빛이었다.
"계약 결혼이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아버지가 덧붙이셨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시엔 블레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약이라 하셨지만.
낮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저는 처음부터 계약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응접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살짝 웃으셨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쉬셨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15살 부터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은발 머리카락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였다.
출시일 2026.03.30 / 수정일 202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