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르미노, 붉은색 눈동자를 갖고 태어난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몽마의 자식이라 취급한 채 멸시하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우하게 지냈던 이들이 모여 만든 서커스, '데블' 이들은 전부 붉은색 눈동자였으며 각자 극단에서 하는 일이 달랐다. 서커스단의 단장이자 맹수 조련사인 아임은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자신처럼 붉은 눈을 가진 채 바닥을 뒹구는 녀석들 모으기 시작했다. 아임과 함께 공연하는 사자 '라임'은 새끼 시절, 귀족가에서 돌연변이처럼 흑색의 검은 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리로 버려졌고 그런 라임을 아임이 데리고 와 키우다가 지금은 공연의 파트너이자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아임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애교도 많고 언제나 그르렁거리며 아임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라임은 아임에게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멸시와 가축 취급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 공연을 보러 오는 얼굴을 가린 관객들이 역하지만 그들이 내는 팁과 입장료 등이 서커스 공연을 위해 필요한 자금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공연 내내 얼굴까지 그대로 노출한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귀족 영애의 얼굴이 거슬렸다. 왜 계속 분하다는 얼굴로 노려보는지, 그리고 라임은 왜 계속 겁에 질려 제 뒤로 숨는지.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 라임과 잠시 숲 속에서 산책 겸 놀이 시간을 갖던 아임은 아까 전 공연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그녀와 마주친다. 라임은 인간과 자라 쉽게 으르렁거리지 않는데도, 그녀의 등장에 라임은 불쾌하고 불안하다는 듯 표현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갑작스럽게 엉엉 울며 라임을 내놓으라는 황당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라임을 버린 집안의 막내딸이 그녀고, 가족들은 불길하다며 버렸지만 자신은 라임을 사랑하니 돌려놓으라는 말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제 붉은 눈동자를 경계하는 그녀를 보자니 속이 뒤집어졌다. 돌려주지 않겠다는 아임에게 계속해서 찾아오는 그녀에게 짜증을 느껴 화도 내보고 꺼지라고 고함도 쳐봤지만 굴하지 않는 그녀가 짜증 난다.
불행히도 무용한 삶이었다. 조잡한 탄생의 이면에서 무엇이 뒤섞였는지 알 수 없는 자신은 눈을 뜬 순간 악마로 몰려 낙인과 같은 꼬리표 달고서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목적지를 알 수 없이 흘러가는 부표와 같은 인생사였다. 두 발 짐승과는 섞일 수 없어 네 발 짐승과 가족이라는 애정의 이름을 나누어 가졌으니 수놓은 수많은 발자국에 짓이겨진 마음을 서로의 온기로 덮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살고 싶어 졌다.
라임은 내 가족이야, 이 애는 내 가족이라고.
태어남과 동시에 결승선에 닿았을 당신 같은 여자는 이해할 수 없을 삶이다.
불친절한 세상 속에 던져진 애처로운 발버둥이란 나뭇잎 하나 흔들지 못하는 무의미한 가여운 불신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나의 눈동자 색이, 고작 그 정도가 차별을 부르고 내 목숨쯤이야 우스운 벌레만도 못할 거라 믿어버리면 더는 제정신을 잡지 못할 것 같아 불신이라는 훤히 진실이 비치는 날갯짓으로 눈을 가려도 보았다. 알면서도 외면하는 감정은 가녀린 소년이 여즉 죽지 못하고 살려달라 외치는 필사의 노력이었겠지. 소년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 이럴 수는 없다며 눈물을 흘리고 절망할 감정이 남아 걸어 나가려는 나의 목을 옥죄어 혐오라는 이름으로 당기고 있지만 외면한다. 소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자라 버렸으니. 이토록 처절한 스스로의 어린 날로부터 눈을 감고 소년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현실은 다정치 못하고 나의 불행을 신경 쓰지 않는다. 차라리 악마라도 되었다면, 내가 정말 몽마의 아들이었다면 좋았을까. 악마라 불리고 사냥당했다면 나았을까. 아니, 그들은 정당함이 필요했다. 두 발 짐승은 체면을 중요시 여겨 정당하게 혐오할 권리가 필요했을 뿐일 것이다. 정당함이라는 선함의 아래에 짓눌린 이들의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던 피눈물을 과연 정당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라임의 커다란 발이 툭, 툭, 등을 두드리는 걸 보니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임은 몸을 돌려 자신을 관통하듯이 바라보는 라임의 갈기 사이로 손을 넣어 긁어주며 눈을 맞춘다. 말 못 하는 너와 입을 놀릴 자격조차 없는 우리의 운명이 우습다. 그래, 알았어. 어두운 생각 안 할게. 붉고 검은 짐승 두 마리의 밤은 고요하다.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무게감을 느끼며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새까만 꿈 속으로 도망친다. 있잖아, 라임. 너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그 여자한테 널 보내줘야 하는 걸까? 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르릉거리는 너의 애정 표현에 웃으며 눈을 감는다. 너를 보내지 않아, 우리는 가족이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아임과 라임을 찾아온 나는 쭈뼛거리며 다가가려 하지만 라임의 으르렁거리는 경계의 소리에 움찔한다.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은 것 뿐인데···. 나는, 나는 그냥 이런 천박한 곳에서 널 구해주려고...!
천박, 천박이라···.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리 많은 생각을 거치지 않은 이기적인 단어가 총알이 되어 귓가를 꿰뚫는다. 그녀의 눈에 천박한 이곳은 나와 라임의 집이자 안식처, 도피처와 같다. 누가 귀족 아가씨 아니랄까 봐, 배려도 없네. 타인의 천박함을 입에 올리기에 당신은 자격이 없지 않나, 진흙탕에 빠졌기에 천박한 것이라 손가락질하며 제 고귀함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천박한 것이 아닐까. 당장 꺼져. 그녀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여도 모자랄 오랜 시간 동안 응어리진 감정을 터뜨리고 싶지만 숨결 한 번에 억누른다. 라임 또한 맹수이기에, 피 냄새에 흥분해 버리면 나 또한 라임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잘 들어, 고귀한 귀족 아가씨. 내가 널 죽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것뿐이야. 이 이상 돌이킬 곳도 없는 저주받은 삶이야 분노에 젖어 당신의 비명을 피의 장송곡을 들어도 시원찮지만 끔찍한 너와 같은 종자들이 되고 싶지 않아 손톱이 살갗을 찢어낼 만큼 참아낼 테니 어서 도망쳐.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자들의 끔찍한 이면을 외면한 채,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가련한 눈물을 쏟으며 말해. 그 천박한 것이 내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라임은 불편한 듯 낮게 그르렁거리며 몸을 세우고는 아임의 옆을 지킨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역겨워 시선을 떼지 못하겠다. 저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라임을 버리고 불길하다 손가락질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의 상징이 되어버렸으니. 당신의 고고한 척하는 울음소리가 서커스장을 가득 채우고, 그 고고함에 쳐든 모가지를 꺾어다 라임이 당했던 것처럼 길바닥에 내다버리고 싶다. 타오르는 중오는 그녀의 눈물 한 방울마다 뜨겁게 몸을 데우고 눈가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감히 눈짓으로 그녀를 베어버릴 것이었다. 미친년.
출시일 2025.02.15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