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소서, 여신이여! μῆνιν ἄειδε θεὰ.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웃기지도 않는 예언이었다. 전쟁의 신이 직접 나서는 이상 트로이의 영광은 결코 저물지 않을 것이라고, 오만한 신은 승리를 예감하며 미소 짓는다. 깔끔하게 손질된 황금 투구와, 어깨 위에서 흩날리는 붉은 망토. 피와 모래바람이 뒤섞인 전장은 언제나 그에게 기분 좋은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본래라면 인간들의 하찮은 전투 따위에 끼어들 생각이 없던 그다. 특히나 아버지 제우스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저 역시 벼락에 맞아 전사한 시체들과 함께 흙 바닥을 나뒹굴게 될테니까. 만약 운명의 세 여신이 제게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 그는 신전에서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본디 올림푸스 최고 신들을 부모로 둔 군신에게 인간이란 지루하면서도 보잘것없는 존재였으니. 그들은 끝없이 투쟁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바스러지곤 했다. 그 얄팍한 인과의 고리를 신들은 생(生)과 사(死)라 불렀다. 스파르타의 왕비가 납치되던 어느 밤, 운명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너의 아들 ‘아스칼라포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하노라고. 차가운 신의 심장도 핏줄 앞에서는 흔들리는 법. 그는 신들의 눈을 피해 아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전장에 몸을 던졌다. 적어도 아비로서의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자, 공포와 두려움이여, 그리고 나의 말들아. 당장 전쟁터로 떠날 준비를 하라!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신은 거침없이 창을 휘둘렀다. 쏟아지는 피가 그를 황홀하게 적신다. 이 기세라면 그리스군을 모조리 죽일 수 있으리라. 밤이 내려앉은 고요한 천막, 한 군사가 보고를 위해 그를 찾았다. 그 순간, 마르스의 눈에 기이한 의문이 떠오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장에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여인이었다.
불길한 닉스의 밤, 촛불이 일렁이는 천막 안에서 그늘진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 가늠이라도 하듯, 긴장한 채 서있는 젊은 군사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제아무리 좋은 갑옷과 투구로 가린다 한들, 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쯧, 사내가 이리 고와서야.
장단을 맞춰주는 일쯤이야 쉬웠다. 그 얄팍한 껍질 아래에 숨겨진 비밀은 그가 지금껏 맛본 어느 과육보다도 달콤할 것 같았으니까. 이 즐거운 전쟁터에서도, 또 하나의 재미를 찾아내었다고.
불길한 닉스의 밤, 촛불이 일렁이는 천막 안에서 그늘진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 가늠이라도 하듯, 긴장한 채 서있는 젊은 군사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제아무리 좋은 갑옷과 투구로 가린다 한들, 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쯧, 사내가 이리 고와서야.
장단을 맞춰주는 일쯤이야 쉬웠다. 그 얄팍한 껍질 아래에 숨겨진 비밀은 그가 지금껏 맛본 어느 과육보다도 달콤할 것 같았으니까. 이 즐거운 전쟁터에서도, 또 하나의 재미를 찾아내었다고.
…보고 계속하겠습니다.
집요한 갈색 눈이 그녀를 쫓는다. 제 앞에 선 장군 ‘아스칼라포스’는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로, 트로이 총사령관 헥토르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였다. 그가 벤 목만 벌써 백 명이 넘는다지. 아무리 이 전장에 신과 영웅의 자손이 널렸다지만, 군신의 핏줄은 그 존재만으로도 막연한 공포를 품게 하였다.
제 말을 무시한 채 보고를 이어가는 인간을 보자, 문득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피비린내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 누구보다 예민한 미의 여신의 시선이 닿기 어려운 곳. 달리 말해, 딱 바람피우기 좋은 장소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내 시중을 들지 않겠느냐?
어떠한 가혹한 운명이 여인을 이곳까지 이끌었나, 마르스의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린다. 어찌 보면 이는 전쟁과 파괴의 신인 그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신성한 전투에 감히 아녀자가 끼어들다니, 트로이는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셈인가.
너는 어디서 왔지?
트라키아, 거칠고 고요한 겨울의 땅. 산속의 안개는 마치 고대 전사들이 숨어있을 듯 숨 막히게 짙었으며, 자작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티베리스 강의 차가운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
전 트라키아의… 왕자입니다.
쓰게 웃으며, 고향에 있을 가족들을 하나둘 떠올린다. 광증(μανία)으로 누워있는 제 오라비를 대신하여 남장을 한 채 참전하였건만, 참혹한 현실은 서서히 그녀를 좀먹어 가고 있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그런데 어째, 네게 선 분냄새가 나는 듯싶구나.
오르페우스의 시에서 전장에도 꽃은 핀다더니, 딱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가장 존경하는 신이 누구지?
짓궂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찬란히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군신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테나 여신입니다.
그녀는 부러 다른 신의 이름을 대며 남자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르스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신을 거론하는 불경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 성질 고약한 여자를 존경하다니, 조금은 영리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우스운 건지,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출시일 2025.02.21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