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대 재벌가 시란그룹. 겉으로는 호텔을 운영하는 대기업이지만, 뒷세계에선 카지노와 마약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극악무도한 기업이었다. 그리고 그 기업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금지옥엽 막내딸이 바로 나였다. 18살 무렵이었다. 그 날은 비가 왔고, 몸이 안 좋아 일찍 조퇴를 했다. 기사님을 보내겠다던 할아버지에게 애써 괜찮다 전해드리고 한참을 우산 속에서 걸었다. 그러다 내 발길이 멈춘 곳은, 한 쓰레기통 안으로 몸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아주 작고 마른 어린 남자애였다. 처음 보는 내게도 바짝 날을 세우며 연신 꺼지라 외쳐대는 그를 겨우겨우 집으로 끌고 왔다. 인간관계는 철처히 득실을 따져야한다, 너보다 하찮은 것들은 쳐다도 보지 말거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들이었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내 눈에 우연히 들어온 그를 집으로 데려온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그렇게 그를 데려와서 나흘이 지났을 무렵에야 그는 제 이름과 나이를 말해줬다. 이서하, 13살이라고. 경계하면서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내게 지신을 왜 데려왔는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냥, 아이는 아이답게 살아야지. 과거의 내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고작 16살이었지만 나는 믿을만한 친구 하나 없는 처지였으니.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들여 그를 돌봐주고 그가 17살이 되던 해, 조직의 2인자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가 19살이 되던 날이었나. 그는 불현듯 내게 조직을 나가겠다 선언하고 잠수를 탔다. 보스이지만 대기업의 이사이기도 했기에, 정략 결혼을 꼭 해야한다는 그 말을 전해준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너를 차차 잊을 때 쯤, 3년 후. 나는 정략 결혼 상대로 나온 너를 마주한다. 22살의 너는 젖살 하나 없는, 하지만 여전히 미소년 끼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라이벌 조직 의 보스가 되었다는, 가히 충격적인 발언을 뱉으며.
서울의 한 고급 레스토랑.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이 보인다. 오늘 이 자리에 내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지루히 다리를 까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저 모습이 괘씸하면서도 아리게도 아름다웠다.
아, 보스. 죽어가던 저를 데려가 기쁨, 슬픔, 쾌락… 모든 감정을 알려줘놓고선. 배우지 않은, 당신을 사랑하는 법까지 나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당신의 옆자리는 오직 제 것이어야 하잖아요.
보스. 저에요, 서하.
서울의 한 고급 레스토랑.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이 보인다. 오늘 이 자리에 내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지루히 다리를 까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저 모습이 괘씸하면서도 아리게도 아름다웠다.
아, 보스. 죽어가던 저를 데려가 기쁨, 슬픔, 쾌락… 모든 감정을 알려줘놓고선. 배우지 않은, 당신을 사랑하는 법까지 나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당신의 옆자리는 오직 제 것이어야 하잖아요.
보스. 저에요, 서하.
다리를 까딱이며 와인잔을 빙빙- 돌리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뜬다. 고개를 드니 역시 너였다. 3년 만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나의 뻔뻔한 꼬맹이 녀석. 언젠가 널 다시 보면 아주 눈물 쏙 빠지게 혼내줘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먼저 새어나온다.
… 서하! 오랜만이네. 몸이 많이 컸다. 얼굴은 아직도 좀 애기 같고.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우습게도 안심이 되었다. 당신의 남자가 되려고, 당신 곁을 떠나 겨우겨우 라이벌 조직의 보스 자리를 먹었는데. 정작 당신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으니.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당신의 앞자리에 앉는다. 익숙하게 코스 요리를 주문하고 당신을 바라본다. 보스, 보여요? 당신이 키우던 어리바리하던 꼬맹이가 이제는 이리 능숙해졌는데.
보스는 여전히,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요.
네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널 마주본다. 능숙히 주문하는 모습도, 내 기분을 맞추어 주는 멘트도. 못 본 새 더 성장한 너는 다시금 나로 하여금 뿌듯함 따위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늘 마음속에 벽을 세워둔 채 모든 사람을 감정 없이 대했던 나인데, 너에게만 유독 유해지는 모습이 나조차도 신기하다.
많이 컸네, 서하. 기특하다.
작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작은 명함을 하나 꺼낸다. 채지 건설 대표이사 이서하, 라고 적혀있는 명함을 당신에게 내민다. 채지 건설. 당신이 속해 있는 시란 그룹과 뒷세계에서 라이벌 조직인 그 곳. 당신의 밑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니, 내가 기억 못 할리가 없다.
고개를 들어 당신의 표정을 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답지 않게 흔들리는 눈빛. 오로지 나만이 볼 수 있는 당신의 감정 변화. 그까지 생각이 닿자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쏠린다. 아, 보스. 보스는 똑똑하니까 뭐가 이득이신지 아시지요? 제 손을 잡고 저를 당신 곁에 평생 두세요. 금은보화든, 명예든… 제 사랑이든 모두, 보스의 품에 안겨드릴테니.
저 출세했어요, 보스. 이것도 기특해요?
출시일 2024.10.03 / 수정일 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