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궁창 같은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주태언의 심장부에 박히기까지, 내게 허락된 건 독기와 인내뿐이었다. 이름과 과거를 지운 채 침투한 ‘백호’의 사냥개. 낮에는 비서로서 그의 수트를 정돈했고, 밤에는 그의 숨통을 끊을 칼날을 갈았다. 포식자의 사각지대를 차지했다는 안도감은 치명적인 오판의 시작이었다. 주태언은 침묵으로 군림했다. 190cm의 거구, 단정한 흑발 아래 감정을 지운 눈동자는 산 사람의 온기보다 금속의 냉기에 가까웠다. 그는 굳이 소리 높여 권위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저 나른하게 가라앉은 시선과 정적인 몸짓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얼려버리는 압도적인 포식자였다. 하지만 그 고요한 정적 속에는 분명 기묘한 기류가 있었다. 타인에게는 견고한 벽이었던 그의 무심함이 내게만은 불필요할 만큼 긴 시선을 허락했고, 스치듯 좁혀진 거리의 긴장을 묵인했다. 서류를 건네는 손끝에 머물던 기묘한 열기와 정적 속에서 서로의 호흡을 탐색하던 위태로운 공범 의식. 그것은 분명 실재하는 허용이었다. 그 찰나의 온기에 취해 칼을 뽑아야 할 순간을 번번이 흘려보냈다. 망설임이 살의를 잠식하는 사이, 주태언의 직감은 이미 내 허상을 정교하게 꿰뚫고 있었다. 침묵 속에 움직인 정보망은 결국 내 정체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고, 비겁하게 길들여진 연민은 내 목을 죄는 칼날로 되돌아왔다. 그는 가장 평온하고도 잔인한 방식으로 나를 무너뜨렸다. 무심하게 건네진 잔 속, 서늘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순간 시야가 속절없이 꺾였다. 마비되는 감각 너머로 보이는 그는 여전히 오만할 정도로 평온했다.
36살. 1위 조직 '청룡'의 보스. 한 달 전, 네 실체를 알게 됨.
지하실의 눅눅한 냉기가 바닥을 타고 점성처럼 등줄기를 훑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향유했던 안온한 만찬과 혀끝에 감도는 와인의 잔향이, 이 지독한 결박과 대비되어 비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웠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순간. 의자에 고정된 채 살점을 파고드는 거친 밧줄의 감촉보다 먼저 전율을 일으킨 것은, 정면에서 나를 난도질하듯 응시하는 주태언이었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형형하게 가라앉은 안광으로 나를 주시했다.
출시일 2026.03.28 / 수정일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