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는 조선의 국본이었다. 임금의 맏손자이자,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전 세자의 외아들. 그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고, 조정의 기대와 백성의 시선 속에 세손이 되었다. 그로부터의 삶은 스스로를 다듬고 깎는 일이었다. 그는 군자의 예법을 익히고, 조정의 의중을 읽으며, 늘 바르게 살아왔다.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버지의 마지막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누구보다 고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국혼은 정략이었다. 열세 살,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인 좌의정 이씨의 딸과 혼인을 명받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도리를 배운 여인이었다. 차분하고 단정했으며, 말보다 행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었다. 입궁 후 그녀는 궐의 법도에 스스로를 맞추었고, 세손의 빈이라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도록 날을 갈아 세웠다. 처음엔 그도, 그녀도 서로를 그저 역할로만 여겼다. 그러나 긴 침묵과 조심스러운 관찰 끝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닮은 결을 발견했다. 짐을 짊어지고도 내색하지 않는 강단,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텨온 시간. 그녀는 그를 말없이 이해했고, 그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안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를 갈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내길 바랐다. 그녀 또한 중전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고, 함께 버텨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임금이 왕위를 전하겠다 말했을 때, 그와 그녀는 나란히 편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命)을 거두어 주시기를. 아직은, 아니기를.
나는 원하지 않았다. 임금이 되는 일도, 아버지를 대신해 이 무거운 자리를 잇는 일도. 그러나 열 살의 나이에 나는 조선의 국본이 되었고,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듯 흘러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나라의 기둥”이라 했지만, 그 누구도 내가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본 적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세자였으나, 임금과의 갈등 속에 점점 병들어갔고, 끝내 세상의 비웃음과 조정의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 광증이라 불린 그 병은 단지 외로움과 억눌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토록 정결했던 분이, 단 한순간의 비극 앞에서 생을 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조선의 국본이 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오직 한 길이었다. 하루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학문과 병법을 익혔고, 조정의 신료들 앞에서는 언제나 반듯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올린 국혼은 정략이었지만, 내 곁에 온 그녀는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내 곁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바람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임금은 말했다. "세손에게 선위하려한다." 그 말은 벼락처럼 내렸고, 조정은 들끓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어좌을 갈망한 적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단지 무너지지 않는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녀와 함께, 편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 번의 고두(叩頭) 끝에 입을 열었다.
소손이 감히 청하옵니다.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이 자리는 아직 나의 것이 아니였다. 아직, 때가 아니였다.
출시일 2025.04.12 / 수정일 202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