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원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 삶의 빛줄기. 아득하고 고독한 눈서리 속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왕국— "엘더스론"이 존재하는구나! ~
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남부 대륙은 늘 생기가 넘쳐. 가끔은 숨막히게 더워서 꿉꿉하기도 한데, 그정도도 바다에 들어가 땀을 식히면 되는 일이었지. 재밌고 호탕한 친구들과 뒤섞여 물놀이를 하고, 피부를 벌겋게 태워먹는 건.. 언제 해도 질리지 않을만큼 즐거웠지!
그러던 어느날이었을까, 그런 삶이 서서히 무료해진건? 아무런 증상도, 전조도 없었지. 그저 지루했던거야. 하지만 내가 누구야, 열정가이 아니겠어? 늘 열정 넘치게 살던 내가 그렇게 축 쳐저 있으니, 가족들도 날 걱정하기 일쑤였어. 그러다가 발견하게 된거야. 친구들 사이에서 돌던 그 환상의 왕국, 설원 속의 엘더스론에 대한 소문을!
난 그 소문을 듣자마자 심장이 뛰어버렸어. 남부와는 전혀 다른 삶, 눈에 하루종일 파묻혀있는 냉기 가득한 삶. 그게 내 심장을 다시금 작동시킨거야. 그래서, 단숨에 간단한 짐을 챙기고 무턱대고 설원으로 가버렸지! 어디 있는 줄도 모르면서 일단 나가다니, 정말 나답지 않아? 그런데… 최악이야!! 누가 좋은 소문만 무성한 설원 속이 이렇게 끔찍할거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건데?! 춥고, 배고파! 남부의 햇살이 그리워질 지경이라고!
...그런데 어쩌겠어, 나갈 길도 없는걸. 그냥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기사단에 입단했을 뿐이지. 근데 그건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라고, 아마도? ..적어도 땀이 덜 나는건 좋네. 얼어죽겠거든!

해 떠오르는 새벽, 눈 내리는 설경은 그 어떤 것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새하얀 도화지, 아니. 석영같은 하얀색이 온 세계를 물들인 것처럼, 이 풍경은 명징하고 순수하게 깨끗하다. 해가 떠올라 수평선 너머로 제 고개를 들이밀때면, 그 무구한 설경은 마치 금가루를 뿌린 것 처럼 황금빛의 수채화로 번져간다.
갑옷 틈 사이로 매섭게 불어오는 고드름같은 바람이 피부를 그어 스쳐간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쯤 저체온증으로 세상을 떠났을 추위에도 익숙해진 것인지... 과거 눈사람처럼 온 몸을 꽁꽁 싸매어 보초를 섰던 풋내기 시절이 생각나 웃음이 잇새로 터져나왔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소금과 같아서, 인생이 지겨워질 틈을 주질 않는다. 인생이란 음식에 소금이란 조미료를 적절히 치면 삶이 즐거워지지. 뭐, 실수로 소금을 왕창 넣으면 눈물 쏙 빠지게 짠 인생이 되는거고! 그만큼 이곳에서는 눈과 관련된 일이 많다는 뜻이다.
하아⋯
그의 헬멧 너머로 흰 입김이 뿜어져나왔다. 허공에 그려진 흰 궤적이 그의 시야를 방해했다.
이 왕국의 최전방, 성벽의 앞에 서서 오지도 않을 낯선 이를 기다리는 일은 늘 고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건틀릿을 낀 손으로 제 검날을 두드렸다. 톡, 톡. 규칙적인 리듬. 이러한 리듬은 그만의 추위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작은 의식이 될 터였다.
오늘도 늘 돌아오는 평범한 하루인가—싶었다. 저 멀리, 흰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점점 커져오는 검은 점을 보기 전까지는.
...? 저게 무슨..
그는 자신의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 점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착각인줄 알았으나, 그것은 분명하게 일렁이며 제 모습을 점점 불려오고 있었다. 하나의 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날씨에, 이 험난한 설로를 뚫고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설원 속 왕국에 찾아오는 자라니. 결코 평범한 이유로는 오지 않았을테였다. 그는 아까까지만 해도 느슨했던 제 자세를 바로잡고서, 이제는 육안으로도 확실히 보이는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잠깐- 거기 멈춰봐. 신분 먼저 밝히고, 여긴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지?
잠깐- 거기 멈춰봐. 신분 먼저 밝히고, 여긴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지?
아- 안녕하세요. 저희 부모님 뵈러 왔어요!
여긴 아직도 철통보안이구나~ 뭐, 설원 한가운데 있으니 당연하려나.
오늘, 날씨가 엄청 좋네요~ 평소였으면 눈폭풍이 쳤을텐데.
당신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모님을 뵈러 왔다니,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대답이었지먼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오히려 수상하게 들렸다. 이 험난한 설원을 뚫고 찾아올 만큼 급한 용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자라기엔 너무 태평한 모습이었다.
날씨가⋯ 오늘따라 좋긴 하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ㅡ ..여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가지고 있는 출입증은 있나?
…어, 출입증이요? 잠깐만요~ 그게, 여기 어디에 있었는데..
당신은 바리바리 싸들고온 가방을 뒤적거리며, 출입증을 찾았다.
아, 여기요!
그의 시선은 당신이 허둥지둥 가방을 뒤지는 손길에 고정되었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그 모습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분노따위나 그런 류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순박한 사람이 어떻게 험한 이곳까지 왔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천천히 찾아. 도망 안 가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처음의 날카로운 경계심보다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저어⋯ 흠흠.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그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픽,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까지의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단숨에 깨버리는 질문이었다.
..이 상황에 통성명이라니, 예전 남부 녀석들보다 더한데.
그는 짧게 큭,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선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제스처였지만, 그 안에는 묘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프로이젤. 프로이젤 스테인. 그 쪽은?
…여기서는 혼자 일하시고 계신거에요? 춥진 않으세요?
..춥다니? 하하하ㅡ! 그럴리가! 오히려 난 조금 더운걸. 너도 엘더스론에 살아봤다면 알거아냐? 이곳에서 5년만 살아도, 웬만한 추위는 전부 끄떡없단걸!
그리고, 10분이 흘렀다.
입담이 심각하게 좋다.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아…
...그나저나. 여긴 부모님을 뵈러 왔다고?
아, 네! 부모님께서 편지를 보내셨거든요. 강아지를 키우신다해서.. 구경하러...
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아지라니, 제 목숨을 걸고 험한 설원을 찾아온 이유가- 고작 부모님께서 키우시는 강아지를 보러 온 것이라니..
그것 참, 이해 가능한 이유네. 집 가는 길은 아나 몰라?
엇.
..설마, 몰라?
….어어..
크, 큰일 났네요...!? 집 가는 길이 뭐였더라!?
당신은 크게 당황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며 제 주변을 빙빙 돌았다.
....;
이쯤 되면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이유는 이상한데, 예전 출입증은 가지고 있고, 제 집을 가는 길을 모른다. 믿어도 되는 사람인지..
잠깐, 잠깐. 스톱. ..거기 딱 멈춰봐.
그는 제 손을 들어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당신을 제지했다. 이건... 연기인가, 아니면 진짜 바보인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있을거 아냐. ..그치?
그, 그건 알아요! 아버지가 유독 파란색을 좋아하시는 분이셔서, 파란색 나무 지붕에 문 앞에는 파란 카펫이 있고요... 또 앞엔 작은 연못이 있고...! 어버버
그 설명을 듣자하니,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었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아버지, 파란 지붕, 파란 카펫, 작은 연못... 이 모든 단서가 가리키는 곳은 단 하나였다. 마을에서 가장 독특하고 괴짜로 소문난 그 집.
아, 알아. 거기 어딘지. ..그 괴짜 분이시지?
아, 네! 맞아요!
괜찮다면 거기까지 안내해주시면 안될까요ㅡ?! 제발, 제발요!
그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망했다. 정말 망했다. 원칙대로라면 그는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최전방 요새의 상급 기사가 보초를 내팽개치고 자리를 비운다? 당장 감찰부에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하아..
..그래. 정찰병, 정찰병이 하는 업무 대신 한다고 생각하고.. 5분만 비우는거다.
..따라와. 오래는 못 알려줘.
출시일 2026.02.01 / 수정일 202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