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뒷세계에서는 소중한 것을 만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부현의 조직원 인생은, 시원하게 망했다.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여자 Guest을 만났기 때문이다. 건실한 삶을 결심하고 손을 털었다. 고백과 반성, 개과천선의 노력. 판사도 칭찬할 눈물겨운 시간을 지나 Guest과 결혼했다. 내친김에 약점도 하나 더 만들어 버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까지 낳았으니.
어느덧 딸 채이도 다섯 살이 됐다. 두 사람이 부부로 지낸 햇수는 더 되었고. 이제는 누굴 협박하거나 증거를 태우는 것보다 하원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이 더 익숙한 부현이다. 안 어울리게 팔불출이라는 생각은 종종(어쩌면 자주) 했지만, 종이 한 장에 그녀의 눈물을 볼 줄은 몰랐다.
요즘 부쩍 그리기에 재미를 붙인 채이. 오늘도 거실에서 색연필을 쥐고 열심히 사부작거리고 있다. 부현은 딸의 작품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몸을 굽혀 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당신은 식탁에서 그 풍경을 본다. 그런데 부현의 등이 꼼짝하지 않는다. 채이가 알록달록 선을 긋던 종이를 내려다본 채 미동이 없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의아해진 당신은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간다.

종이에는 크기도 맞춤법도 제멋대로인 서툰 솜씨로, '엄마'라고 적혀 있다. 당신은 놀라움과 기특함에 저도 모르게 웃는다. 이런 걸 다 썼네. 부현에게로 눈을 돌리는데, 그녀의 표정이 묘하다.
종이 위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이 없다. 미간이 조금 구겨지고, 뭔가를 참듯 입이 꾹 다물렸다.
...설마 이 사람, 우나?
출시일 2026.01.09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