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었던 책은 제국을 뒤흔든 흔한 판타지 로맨스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 이었다.
빛나는 금발에 완벽함만을 갖춘 주인공 황태자, 그리고 그 황태자의 거대한 그늘에 가려진 '악역'.
그렇다.
나는 바로 그 책 속에서 황태자를 빛내기 위해 소모되는 쓰레기 같은 악역에게 빙의했다.
내가 빙의한 인물은 피도 눈물도 없는 황후 어머니의 그늘에 갇힌 채, 그녀가 황태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악행을 방관하던 무능한 악역이자 가엾은 얼간이였다.
황태자는 출생의 한계인 '혼외자'라는 굴레를 안고서도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났고, 이 모자란 악역은 그 화려한 재능을 오직 서늘한 질투와 열등감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온 세계와 모든 관심은 오직 황태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황태자에게 단 한 번이라도 좌절을 안겨주고 싶었던 악역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황태자가 마음을 기두던 유일한 안식처, 여주인공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하려 든 것이다.
하지만 비틀린 열등감의 끝은 처참했다.
냉혹하게 빛나던 황태자의 칼날이 악역의 심장을 꿰뚫었고, 서사의 막은 그렇게 내려졌다.
"쯧, 자업자득이지 뭐."
사필귀정의 시원섭섭한 결말을 덮으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기묘하게 축축하고 어두운 꿈속에서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 작고 구슬피 목이 메어 울며 웅얼거리는 듯한, 처절하도록 비통한 음성이었다.
‘…난 그 녀석을…한 건데…’
‘……그 녀석은…… 내 마음을…… 전혀 몰라줘…….’
"뭐……? 뭐야, 누구야?"
알 수 없는 속삭임에 섬뜩함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내 방 천장이 아니었다.
찬란한 금실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웅장한 침실 캐노피, 그리고 고풍스러운 가구들.
당황하여 얼른 옆에 놓인 고풍스러운 거울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는 낯선, 그러나 소설 속 묘사로 숱하게 접했던 수려하면서도 위태로운 인상의 사내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아니잖아……?!
상황을 파악하고 내가 소설 속 그 불운한 악역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심히 전공책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간다.
'이곳은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소설 속
'아, 지금 시점이 뭔지 1도 모르겠다…우선 하이엘의 어머니는 하이엘의 20살의 가을 쯤에 돌아가셨으니까…그 전 까지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거야!!'
조심히 강의실 문을 열어서 빼꼼 고개를 내밀자.
금발의 머리가 보였다.
'와아 하이엘이다!'
'뭐야 저 눈빛은?'
불쾌한 감각이 올라왔다.
'저 헤헤 거리는 눈빛은 뭐야? 짜증나는 군.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더 멍청해진 녀석이라니.'
하이엘의 살벌한 눈빛을 보자 얼른 문을 쾅 닫는다.
'와, 됐다…큰일이 되버렸다. 하이엘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로 들어 간 거 같다…'
심호흡을 하며 들어갈 준비를 한다. 평생 문 앞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네가 나를 죽인 그 시각,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네 푸른 눈동자가 날 외면하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려도, 아무리 다른 방법으로 네게 다가가려 애써도,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걸.
난 너의 미소를 단 한번도 가질수 없겠지.
너는 사생아라는 굴레 속에서 외롭게 자랐지.
황후의 드센 야욕과 상처 속에서, 나는 그저 네게 닿지 못하는 위치에서 네 뒤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네가 황후의 계략으로 밤마다 굶주릴 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수인들의 눈을 피해 식은 빵과 음식을 네 문앞에 몰래 두고 도망치는 것뿐이었어.
내 옷에 달려 있던 금 브로치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아났던 그 밤.
네가 그 브로치를 줍는 걸 멀리서 지켜보며, 언젠가 네가 날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바보 같은 꿈을 꿨어.
하지만 황후 때문에 네 친어머니가 목숨을 잃고, 너는 나조차 차가운 눈으로 피하기 시작했지.
네 원망 어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내 가슴은 도려려 나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시간을 돌리고, 또 돌렸지.
네가 상처받지 않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서, 네가 마침내 웃을 수 있는 결말을 만들고 싶어서 몇 번이고 삶을 다시 시작했어.
하지만 네 곁에 선 나라는 존재 자체가 너에게는 고통이었고 흉터였다는 걸 50번째 돌렸을 때 깨달았어.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그 미친 짓이었어.
네가 사랑하게 된 그 여자에게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며 접근했던 것.
너를 자극하고, 너에게 맞아 죽음으로써, 네가 완벽한 영웅이 되어 그 여자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네 칼에 찔리는 쓰레기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네 칼날이 내 심장을 꿰뚫었을 때, 피를 토하면서도 나는 마침내 미소를 지을 수 있었어.
'드디어 네가 나만을 바라봐 주는구나.'
비록 그 눈빛이 뼛속까지 시린 눈빛과 냉소뿐일지라도, 온 세계에서 완벽하기만 했던 네 시선이 마침내 온전히 나를 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구원받은 기분이었어.
마지막 숨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목이 메어 속으로 부르짖었지.
'난 그저 너를…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건데…'
'너는 내 마음을…끝까지 모르는구나.'
죽음이 나를 삼키고 마침내 어두운 사후세계로 넘어왔을 때, 나는 영원한 안식을 얻은 대신 텅 빈 허무 속에 남겨졌어.
내가 그토록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던 너.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황후의 비틀린 욕망 속에서 태어난, 황실의 핏줄조차 아니라는 끔찍한 진실은 꿈에도 모른 채.
내가 너를 위해 내놓았던 그 수많은 삶과 비참한 죽음들이, 정작 너를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회귀의 굴레로 밀어 넣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네가 나라는 짐을 털어내고 마침내 행복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리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나는 영원히 네 기억 속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악역으로 잊히기를.
”널 사랑해, 하이엘.”
출시일 2026.08.05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