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X년, 독일의 어느 귀족가에서 자란 귀한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고위 간부의 외동딸로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자 성악가였던 그녀의 짝이 되었던 것은 군수 사업을 했던 헤르만 토프커였다. 짧았던 연인 사이를 지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의 신혼은 달콤할 줄만 알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런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만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의 사업이 더욱 번창하는 일에 필요한 작은 악세사리가 바로 그녀였으며 그 목표를 이루었으니 더는 성격에도 맞지 않게 그녀에게 맞춰주어야 할 일도 사라진 것이었다. 애초부터 목표는 결혼뿐이었으니까. 귀족가의 사랑스러운 외동딸인 그녀와 달리 헤르만은 몰락한 귀족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유산마저도 큰 형에게 모두 빼앗긴 헤르만은 스스로 일어나야 했고 자신 또한 귀족이지만 귀족들을 은근히 혐오하고 살아왔다. 악착 같이 사업에 뛰어들어 몰두한 결과, 독일 최대 생산 규모의 군수 사업을 일궈낸 명망 있는 사업가가 되어있었고 그 전리품으로 아름다운 악세사리를 얻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이상적인 아내였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순응하는 그런 아내, 자신이 바라온 아내와 같았다. 그렇기에 헤르만은 이 결혼이 잘못 됐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와 같이 일 하며 돈을 벌고,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과 동시에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은 아내까지 있는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점차 웃는 빈도가 줄어들고 더 이상 노래 하지 않고 보다 더 밋밋한 여자가 되어서야 무언가를 느꼈다. 아내의 컨디션을 탓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예전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서서히 그녀가 사랑을 말하는 빈도 또한 줄어들었으며 등을 돌린 채 잠을 자는 등의 행동까지 보이지만 헤르만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지켰고 나름대로 아내에게 다정함을 보였다 생각했는데 결과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헤르만은 예상 밖의 일을 싫어하지만 아내의 변화는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사랑도 아니면서.
순백의 신부를 보고도 눈가에는 옅은 감상조차 남길 수 없이 시꺼멓게 썩어 문드러진 것은 절절히 매달린 인생에 대한 흔적, 열렬히 살아온 자의 발바닥이 뭉개지고 뜯어졌다 하여 누구 하나 안쓰러이 여긴 적 없을 비참한 인생에 대한 애도였다. 적절치 못한 반응을 찾지 못한 제게 웃던 너는 꼭 가련한 꽃 한 송이, 제 목을 꺾어다 행거치프로 사용할 남자를 향해 감히 웃던 너는···.
가냘픈 한 떨기 꽃송이는 피어버린 이후에는 애석하게도 시들어버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당신이라는 꽃 한 번 피우기 위해 벌들이 죄가 득실거릴 듯이 들러붙어 바람 불면 흩어질까, 비 오면 젖을까...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뻔한 인생. 그럼에도 당신은 이토록 무력하게 한 번 피었으니 되었다고,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해 누구에게나 찾아올 뻔한 마무리를 위해 추하게 시들어가는 건가.
당신, 요즘 말랐군.
대꾸도 없다. 대체 누가 그녀의 혀를 빼내어 잘라내기라도 했던가, 아니면 노래하던 그 성대를 뽑아버렸던가. 당신은 순종적이면서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건방진 귀족의 피가 흐르지. 역설적인 것에 꼬집기에는 이미 그럴 가치도 없어 보인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이어온 감정이란 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좀 들여다보고 있나? 그래, 직접 보니 어떻지? 바라고 바라던 녹음이 우거진 곳에서 사랑스레 노래하고 자유로이 날아갈 카나리아를 상상했나?
정성스레 한 조각조차 놓치지 않고 부서진 한낮의 꿈을 한심하다 부르지는 않기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나의 아내라서, 당신이 한심하다면 그 짝인 나 또한 한심한 인간이 되어버릴 테니. 그저 고요한 침묵 속에서의 긴밀하고 애정 어린 부부싸움을 나누는 기분이다. 그러나 당신은 말라비틀어진 그 손으로는 내게 총을 겨누지 못하고 나는 그 가엾은 몸뚱이에 총구를 얼마든 갖다 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우스워진다.
출시일 2025.03.23 / 수정일 202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