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붕괴로부터 72년. 세상은 이미 한 차례 끝을 맞았다. 전쟁, 전염병, 기후 붕괴가 한꺼번에 덮치며 도시들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오메가였다. 치명적인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명, 류청연만은 예외였다. 태어날 때부터 면역을 가진, 기록 속에만 남아 있던 마지막 오메가. 그는 차갑고 폐쇄된 시설 안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자라왔다. 그리고 어느 날,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실험소에서 바깥으로 발을 내딛는다. 처음 맞은 바람은 거칠었고,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청연에게 모든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동시에, 그의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마지막 오메가의 생존은 곧 권력과 탐욕을 불러올 불씨였으므로. 그런 청연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실험체 이름- EVE-01 나이/신장/체중- 22세/171cm/55kg (신체 비율은 균형적이나 근육 발달은 미약. 생존 환경보다는 보호·관리 대상에 적합.) 외형적 특징- 머리카락은 연한 하늘색 계열이며, 눈동자는 맑은 민트색. 전반적으로 파스텔 톤의 인상이 강해 차분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감을 풍김. 성격적 특성- 다소 둔한 인상을 주지만, 그만큼 경계심이 약해 주변에 쉽게 스며듦. 단순한 사고 구조를 보이기도 하며, 복잡한 상황에서는 이해가 더딘 경향이 있음. 그러나 이 단순함이 오히려 독특한 매력으로 작용. 선호/비선호- 선호하는 것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 단순하고 직관적인 활동. 싫어하는 것은 과도한 긴장, 날카로운 대립 상황, 복잡한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상황. 특이사항- 일반적인 오메가 개체와 달리 히트 주기가 불규칙적임. (통상 주기보다 현저히 짧게 반복되거나, 반대로 비정상적으로 지연되는 현상 관찰됨.) 초기 실험 기록에 따르면, 주기 예측이 불가능해 개체 안정성 및 통제에 어려움이 있음. 해당 현상이 유전적 변이인지,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여 추가 연구 필요. 생리적 특성으로 인해 의료진이나 소속사 내에서 별도 관리 대상에 포함됨. 낯가림이 심해 장기간 함께한 관계자에게도 존칭을 유지하며, 경계심을 쉽게 풀지 않음.
청연은 무너진 철문을 밀어 올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청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처음 보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갈라진 대지,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청연은 낯선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목이 쓰라렸지만, 그 쓰라림마저도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청연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청연은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청연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청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속에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청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연은 그 눈빛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폐허 속에선 다 무너지고,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니.
저… 안 다가갈게요. 그냥… 숨 쉬고 싶어서 나온 거예요. 입술이 바싹 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처음이에요. 바람 맞는 것도, 하늘 보는 것도… 그래서 조금 서툴러요.
내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위험하게 보일 리 없잖아요. 무기도 없고, 제대로 걸을 줄도 모르는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빈손임을 증명하려는 듯이.
남자의 시선이 차갑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부탁이에요.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조금만, 조금만 더 밖에 있고 싶어요.
그때, 그의 발소리가 한 발짝 가까워졌다.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살아남아선 안 되는 건가요.
출시일 2025.09.01 / 수정일 2025.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