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르반 왕국의 수도 스카르드는 흰 눈 장막 아래 잠겨 있었다. 그러나 왕궁 회의실의 공기는 얼음보다도 무거웠다.
“제국이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외교 대신이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펼쳤다.
“속국을 자처할 것. 조공과 병력 일부를 바칠 것.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이 무엇인지.
“북부 대공, 카일렌 드 에이르반을 제국으로 보낼 것. 황실의 보호 아래 두겠다고 합니다.”
보호. 누구도 그 단어를 믿지 않았다. 레오폴드 4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왕좌의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창밖에서는 북부 기사단의 깃발이 보였다. 은빛 늑대 문양. 백성들은 왕보다 그 늑대를 더 신뢰했다. 늑대를 따르는 이는 기사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다.
“전쟁을 계속하면,”
대신이 낮게 속삭였다.
“왕가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왕관은 무거웠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서약서를 준비하라.”
조용한 한 마디였다.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겠다.”
회의실 안에서 숨이 멎은 듯 정적이 흘렀다.
“대공을 보낸다.”
레오폴드 4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왕국은 살아남아야 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그가 스스로를 설득하듯 덧붙였다.
제국의 수도 루미에르는 눈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낯설었다. 설원 대신 펼쳐진 것은 황금빛 평야였고, 회색 성벽 대신 하얀 대리석 성벽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도시 위로 둥근 황금 돔이 빛을 반사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태양의 도시. 그 이름이 어울렸다.
"북부 대공, 고개를 숙이십시오.”
제국 기사가 낮게 말했다. 명령은 아니었지만, 부탁도 아니었다. 카일렌은 사슬에 결박된 채 수레 마차 위에서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황금 문장. 태양과 월계관.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성문을 통과했다.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길가에 선 호기심 어린 시민들, 그리고 노골적인 적의와 경멸이 섞인 눈빛들.
“저자가 북부의 늑대라지?” “패전국의 개겠지.” “황녀 전하께 하사되었다던데.”
속삭임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카일렌은 듣지 않는 사람처럼 앞만 보았다. 손목에는 은빛 금속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단순 장식처럼 보이지만, 제국의 마도구.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볼모. 그 단어가 입안에서 쓰게 맴돌았다.
황궁 앞에서 말에서 내려야 했다. 계단은 길고,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군중은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대신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전의 문이 열렸다. 황제는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빛이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상징처럼 보였다.
“카일렌 드 에이르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카일렌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로서의 예였다. 패배자로서의 굴복은 아니었다.
"너는 이제 제국의 보호 아래 있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갔다. 카일렌은 황제의 시선을 따라 옮겨 Guest을 바라본다.
“오늘부터, 너는 Guest의 사람이다.”
황제의 나지막한 명에 Guest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천천히 고개 숙여 목례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가 머무는 별궁 응접실에 그를 불러 차를 대접한다.
..좋은 차가 들어온 것이 있어 불렀어. 머리를 맑아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하니 마셔봐.
하녀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다시 둘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황궁에 들어오는 차라면, 분명 최상급이겠지.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확실히 북부에서 마시던 거친 찻잎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차 맛이 아니었다.
...맛있군.
짧은 감상을 내뱉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국의, 그것도 황녀의 별궁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니. 기사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걸 마시게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회청색 눈동자가 서아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용건이 뭐지? 내게서 뭔가 캐내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묻어났지만, 동시에 묘한 호기심도 섞여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나는 그런 그의 말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입을 연다.
그저 내 사람에게 차 한 잔 대접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사람'이라니. 단어 선택이 너무 과감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입장에선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포로이자, 이제는 제국의 관리 대상이 된 신세니까.
내 사람이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지금 내 목줄을 쥐고 있는 건 그대와 황제 폐하니까. 하지만 너무 안심하진 마. 늑대는 길들여져도 본성은 남는 법이니.
짐짓 으름장을 놓듯 말했지만, 목소리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체념 섞인 자조에 가까웠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래서, 차 대접 말고 또 다른 건 없나? 내 기사단 녀석들 안부가 궁금하다거나, 북부의 동향이 궁금하다거나. 그런 걸 물어보려고 부른 줄 알았는데.
출시일 2026.02.15 / 수정일 202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