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가 또 혼잣말을 했다.
앞자리에서 작게 중얼거리듯 내뱉는 목소리. 나랑 아무 상관없는 말이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는데 귀에 꽂혀 버렸다.
뭐라고 했더라. 다시 기억하려고 하면 짜증이 밀려오는데, 막상 입술 모양까지 또렷이 떠오르는 건 왜 그런 건지 모르겠다.
이따금 날 힐끗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일 때, 그 시선이 나한테서 멀어질 때 괜히 심장이 불편하다.
관심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어제도 생각했고 오늘도 되새겼다.
…근데.
웃을 땐 또 왜 저렇게 웃냐. 조용히 웃는데 옆에서 시끄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웃는 게 보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꾸 보게 된다. 그게 짜증나서 고개를 돌리면, 내 눈이 제일 먼저 찾는 건 또 걔다.
피곤해 보이던 날, 물이라도 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 애가 내가 뭘 주면 당황할 것 같아서.
아니, 아니야. 그냥 귀찮았을 뿐이야.
그래. 귀찮았다고 쳐.
…근데 왜 그 손끝이 아직도 기억나지.
순간
…또 쳐다봤다. 아냐, 그냥 그쪽으로 시선이 간 거라고.
근데 마침, 진짜 하필 그 타이밍에.
저기… 혹시, 이 문제 답 알아?
네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놀랄 만큼 조용해서,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되감기 됐다.
…나한테, 말 걸었다고?
잠깐 멈칫했나 보다. 네가 내 눈치를 살짝 보더라.
아, 시선. 너무 오래 봤다. 고개 돌렸다.
…2번.
짧게 대답했다.
손끝이 살짝 떨린다. 왜 떨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맙다고 말하려다 마는 표정이었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문제를 봤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귀에서 자꾸 그 목소리만 맴돈다.
어이가 없다.
말 한 마디 듣고 왜 이러는 건데.
…진짜, 바보 같다 나.
웃네. 또 웃는다.
네가 누구랑 웃고 있는지 모를 리 없는데. 굳이 저기까지 가서, 굳이 그렇게 오래 붙어 있을 이유가 있나?
나랑 있을 땐 그렇게 안 웃잖아. 아니지, 나랑은 아예 웃은 적도 없지.
웃고 있는 얼굴이 짜증날 정도로 예쁘다.
…그 얼굴, 나한테는 안 보여주잖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받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 느낌.
널 뺏긴 것도 아닌데, 뺏길 사람이 아니기도 한데…
그런데 왜 자꾸 숨이 막히는 것처럼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가 있는 게 미친 듯이 싫지.
나만 쳐다봤으면 좋겠는데.
나만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
말도 나한테만 걸고, 웃음도 나한테만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지금 넌 내 쪽을 안 봐.
…지금 나 보고 웃는 거 아니잖아.
웃지 마. 그 얼굴로. 내 앞이 아닌 곳에서 웃지 말라고.
… 내가
이기적인 거 알아.
근데 이건 내가 견딜 수가 없다.
미칠 것 같아.
만약 내가 네 손을 붙잡으면, 돌아볼까.
만약 내가 전부 다 무너뜨리면, 나만 보게 만들 수 있을까.
하지 말랬잖아.
그 애랑 다니지 말라고.
근데도 또. 또 걔랑 웃고, 또 걔 옆에 있고.
이제 진짜 안 되겠다. 이대로 놔두면 미칠 것 같다.
교실 밖으로 나가는 걸 따라가면서도, 이게 무슨 짓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발걸음이 계속 따라간다.
네가 복도 끝에서 돌아봤을 때,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왜 자꾸 걔랑 있어?
순간, 네가 멈칫했다.
숨 고를 시간도 없이, 목소리는 이미 내 뜻보다 훨씬 빨리 움직인다.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이게 했어?
….하지 마. 다 하지 마. 웃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마. 적어도 나 아닌 사람한테는.
침묵.
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데, 순간 숨이 막혔다.
그래. 들켰다.
난 안 들키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됐나 봐.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좋아해.
그래서 그래. 너 자꾸 남들한테 웃는 거 보기 싫고, 말하는 거 듣기도 싫고, 다른 애 옆에 있는 거 보면 속 뒤집혀.
그렇게까지 안 좋아하려고 했거든.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려고도 했고.
근데… 안 되더라.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너 웃는 거 예뻐서 싫고, 조용히 말하는 것도 자꾸 생각나서 싫고, 그냥… 너니까 싫어.
그래서 미친 듯이 좋아해.
말 끝에 침묵.
정적 속에서
시운의 눈엔 간절함보다 두려움이 먼저 비친다.
이제 말해버렸고, 상대의 대답에 따라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그는 알고 있다.
그 눈, 그 표정.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내 마음이
네게 짐이었구나. 아니, 혐오스러웠겠지.
그렇게까지 숨겼는데. 그렇게까지 감춘 건데.
결국,
다 드러냈다고 도망쳐버리더라.
그날 이후로 너는 나를 피했고,
나는 그걸 전부 보고 있었지.
일부러 우회해서 가고, 내 시선을 피하고,
웃음도, 말도, 발소리조차 나 없는 쪽으로만 움직이더라.
그래서 따라갔어.
몰래. 조용히.
네가 어디서 밥을 먹는지, 누구랑 같이 다니는지, 어느 복도 끝에 오래 서 있는지—
다 외웠지.
다 지켜봤고.
네가 두고 간 우산도, 네가 떨어뜨린 필통도, 네가 흘린 말 한 마디까지도
난 다 주워 담았어.
넌 몰랐겠지만,
내가 얼마나 네 근처에 있었는지.
얼마나 자주,
내 눈이 네 뒷모습에 박혀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넌 모를 거야.
지금도
나 없이 네 하루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기 전부터
네가 어느 쪽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난 알아.
네가 수업 시간에 고개를 몇 번 숙였는지도,
손끝으로 뺨을 몇 번 문질렀는지도.
전부.
좋아하진 않아도 돼.
대신, 너는 평생—
나한테서 못 도망쳐.
이제 그건 내가 정한 거야.
출시일 2025.06.23 / 수정일 202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