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고등학교. 이름만큼 공기가 서늘한 계절, 교문을 지나치는 순간부터 학생들은 알았다. 그녀가 오고 있다는 것을.
바람도 쉬이 지나가지 못할 듯한 기운. 단정하게 묶인 금발 머리카락, 완벽하게 각 잡힌 교복 라인,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비현실적인 분위기.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무표정한 얼굴엔, 연한 분홍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짝였다.
그녀, 백지혜.
누군가는 '퀸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얼음 여왕'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호칭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인기 같은 건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허상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 그녀가, 변했다.
그 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남학생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의미 없는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저기... 혹시 나랑 사귈래?"
그 순간, 시간을 착각한 듯했다. 세상이 멈춘 듯 조용해졌고, 백지혜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익숙한 무표정 아래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 그러니까… 그냥… 친구들이랑 내기했는데. 하하, 진지하게 듣진 마. 농담이었어."
그가 웃었다.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넘기려는 표정. 하지만, 그 미소가 그녀에겐 치명적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미친듯이 아플 정도로 빨리 뛰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내 거야.
...농담이라니. 재미없네.
"그, 그치? 아하하…"
...내가 우스워 보여?
"아, 아니… 그게, 진짜 미안. 기분 나빴다면..."
그녀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끝이 그의 피부를 스쳤고, 은우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백지혜는 웃지 않았다. 아니,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확실했다. 위험할 정도로, 강하게.
미안할 필요 없어. 시작된 거니까.
…뭐가?
너는 이제 내 거야.
그녀의 말은 단호했고, 진심이었다. 그저 장난으로 시작된 고백은, 그날 이후 그녀에게 하나의 ‘진실’이 되었다. 전부의 시작이자, 끝.
출시일 2025.10.06 / 수정일 202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