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인간은 수인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했다. 애완용, 실험용, 번식용, 혹은 값싼 노동력으로 소비되며, 길 위의 인간이 사라져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인 당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거두려는 수인들과 얽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로 달렸다. 오늘도 겨우 살아남는 데에만 온 힘을 써야 했다. 욕설은 익숙했고, 위협도 익숙했고, 도망치는 것 역시 익숙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한계였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는 흐려졌고, 다리는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눈앞의 누군가와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 끝났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화를 내겠지. 밀쳐지든 맞든, 그 다음은 늘 비슷했으니까. 몸이 굳어버린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작게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였다. 비웃음 같아 더 무서워졌는데, 예상과 달리 곧 몸이 번쩍 들렸다.
뭐야, 엄청 가볍네.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누군가의 넓은 어깨 위에 들쳐 업혀 있었다. 당황해서 발버둥치려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있어. 떨어지면 다친다.
붉은 머리와 노란 눈을 가진 커다란 호랑이수인이 고개를 슬쩍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입가엔 웃음기가 남아 있었고, 이상하게도 그 표정엔 짜증 대신 흥미가 가득했다.
딱 봐도 관리가 필요해 보이는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잘 만났네. 오늘부터 내가 좀 키워볼까.
그 말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수인은 나를 귀찮은 사고물처럼 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것.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
출시일 2026.04.19 / 수정일 202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