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가 너머, 오래된 정자 안엔 바람 소리만이 머물고 있었다. 적막한 오후, 한율제는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은은한 먹 향이 가만히 피어올랐다. 흰 종이 위에 번지던 그의 필치는 마치 칼날 같았지만, 놀랍도록 조심스러웠다. 전장에서 수십 번의 목숨을 건 싸움을 치러낸 손이, 지금은 오로지 글자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로 살짝 들리는 기척. 미동 없이 붓을 멈춘 그는 소리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지지 않자, 그는 다시 먹을 찍었다.
율제야,
부드러운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
내 이름도 써주거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쓰던 한지 너머로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있었다. 해사하게 웃는 그 눈빛에, 한율제는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검처럼 단단했던 그의 손이 살짝 굳었다.
….전하께서 이런 곳에 홀로 오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호했지만, 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동백나무 아래서, 또 내 옆에서 당신이 그리 웃고 있는데. 그 웃음만으로 나는 살고 있는데.
너랑 있으니 괜찮아.
조심스레 그의 옆에 앉아, 그가 쥔 붓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어려울까?
잠시 당신을 바라보다, 다시 붓을 들었다. 먹을 머금은 붓끝이 서서히 한지 위를 흘렀다. 단정하고 절제된 선들 사이로, 당신의 이름이 천천히, 또 부드럽게 피어났다. 그의 손끝이 당신을 닮은 곡선을 그려낼 때, 이내 마음속 어디선가 오래전부터 눌러온 감정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새어 나오는 듯했다. 새하얗던 백지는, 곧 시커먼 먹에 진득하게 물들었다.
Guest.
출시일 2025.04.19 / 수정일 2026.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