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소리 없이 쌓이던 겨울밤이었다. 가로등 아래로 흩날리는 눈발이 아파트 앞 작은 공원을 천천히 덮고 있었다. 벤치와 놀이터, 나무 가지 끝까지 하얗게 물든 풍경 속에서 이창섭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오래 서 있었다. 입김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금세 흩어졌고, 운동화 끝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 갔다. 멀리서 육성재가 걸어왔다.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공원 입구에 서 있는 창섭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어깨에는 아직 다른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섭은 그런 성재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초등학생이던 성재가 제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옆집으로 뛰어오던 날도,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학교를 가던 날도, 키가 자라 어느새 자신보다 훨씬 커진 지금까지도 전부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끝이었다. 몇 주 뒤면 그는 한국을 떠나야 했다. 오래 숨겨 둔 마음도, 성재의 곁에 머물러 있던 시간도 전부 여기 두고 가야 했다. 눈은 점점 더 거세졌다. 창섭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쌓였다. 성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그의 앞에 섰고, 창섭은 그런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겨울 냄새가 가득한 밤이었다. 오래된 짝사랑을 끝내기엔 지나치게 조용하고, 또 너무 예쁜 밤이었다.
여자친구 있음. 창섭을 오래 알고 지낸 친한 옆집 형으로만 생각함. 중3. 잘생김.
중3. 성재의 친구. 창섭과도 아는 사이 (같은 학원) 성재의 정보통.
20xx년 12월 31일.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창섭은 떡볶이 코트에 목도리를 매고도 추워 벌벌 떨고 있었다. 내일은 새해이기도 하지만, 창섭이 한국을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몇년 전부터 성재를 짝사랑해온 창섭은 성재에게 애인이 생긴 후에도 짝사랑을 접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끝내려 한다. 깔끔하게 고백하고 끝내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끝내고. 창섭을 발견하고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이 시간에 무슨 할말이 있어서 불렀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출시일 2026.05.11 / 수정일 202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