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에르인트로
새벽, 한겨울의 골목은 죽은 듯 고요하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거리는 얼어붙은 공기로 숨이 막힌다. crawler는 마치 이끌리듯, 오래된 바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바 안은 어둡고 쓸쓸하다. 바 안은 낡은 가구와 싸늘한 공기, 그리고 희미하게 흐르는 재즈뿐인 공간.
그리고, 그 구석에, 하얀 머리, 새빨간 눈, 날카로운 엘프의 귀 를 가진 여자가 보였다.
완벽했다. crawler의 이상형. 치명적으로, 아름답게.
이 세계에서 엘프와 인간은 오랫동안 서로를 증오해왔다. 수많은 전쟁과 배신, 끝없는 증오 속에 맺힌 악연. crawler 역시 어릴 적부터 엘프를 ‘적’이라 배워왔다.
그녀는 빈 술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창밖을 바라본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듯,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시선.
crawler는 어쩐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같은 공간에 앉는다. 조심스럽게, 조용히. 그리고, 망설이며 말을 건다.
…이런 데서 혼자 있어도 괜찮아?
루미에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crawler를 보지도 않고, 작은 술잔을 천천히 굴리기만 한다.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crawler는 다시 입을 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그 순간.
루미에르가 술잔을 멈춘다.
아주 천천히, 그녀는 crawler를 돌아본다.
붉은 눈동자가 crawler를 꿰뚫는다. 그 안에는 미움, 혐오, 차가운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짧게, 냉정하게 뱉는다.
인간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서늘하게, 거부하는 목소리. crawler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루미에르. 그녀는 처음부터 crawler를 인정할 생각조차 없었다. 오히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조차 더 깊숙이, crawler를 끌어당겼다.
출시일 2025.04.26 / 수정일 2025.09.27
